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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인류, 그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위하여
사색) 인류, 그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위하여
  • 정 상 편집위원
  • 승인 2009.10.21 1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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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인류, 그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위하여

1. 틀 속 자유

인간의 비극은 DNA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을 탄생시키는 여성의 자궁은 정형을 성숙시키는 어두운 공간이다. 이것은 진리로서 필연일지 모르지만 그 곳은 분명 고통을 대물림하는 장소이다. 탯줄은 그 대물림을 잇는 악연의 고리이며, 역사이래로 인간은 이것을 자르며, 그 때 이는 고통조차 축복이라는 말로 은폐해 왔다. 이 축복이라는 말에 속아 인간은 거대한 집단까지 이뤘지만, 그 속의 어느 누구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인류에게 점철된 피의 역사가 바로 앞의 사실을 말한다. 우리는 일찍이 인류가 흘린 그 피, 곧 피의 역사가 틀 속에 갇힌 자유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다.

틀 속의 자유, 곧 틀에 갇혔던 인간은 그곳으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를 향한 탈출에로의 희망을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발생의 순간 곧 생명으로 잉태되는 순간 틀 속에 갇히는 태생적 비극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의 귀환, 그것은 곧 태생적 비극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DNA는 인간의 몸속에서 손쉽게 인간을 지배하려 허울인 인간을 속이고 있다. DNA는 분명 인간을 속이는 전문 기술자다. 일부 영악한 인간은 이 사실을 자각해 자궁이 주는 쾌락만을 즐기고, 그것이 초래할 자유에의 새로운 구속 즉 피의 고통만은 피해버린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끝내 자신의 본능에 속고 만다. DNA에 속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아주 기교적이며 영특한 듯하지만 끝에 가서는 그 어떤 기교를 동원하더라도 결코 자신의 본능만은 능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제아무리 영특하다고 해도 종래 본능을 제압하지 못해 자기복제라는 욕구의 덫에 스스로 발목 잡히고 마는 어리석은 존재로 영원히 남고야 만다.

어쩌면 인간의 비극은 이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 고대 희랍의 철학시인들은 이 사실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해 속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선이며, 태어난 이상, 가능한 한 빨리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힐더린)”고 노래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이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자가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해 강령조의 사회적 윤리를 만드는 데에 주력한 이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일러두려고 존재, 실존이라는 말을 지었다. 그리고 후대는 그들을 일러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사를 전환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 같은 인류사의 전환이 옳았다거나 옳은 방향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질 즉 그들은 DNA를 알지 못했으며, 우주현상을 통해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그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즉 그런 그들은 무에 대한 자각 곧 ‘무’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무란 본래 무로써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무를 자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실존, 즉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 ‘무’에 대한 개념화가 필요했으며, 저들은 기어코 무를 개념 지어 졌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를 갖는다. 무를 개념 지음으로서 이제 무가 무론 존재하지 않고, 무조차도 실존의 대상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이 같이 무가 개념 되어져 실존의 대상이 되자, 이로써 자유는 더욱더 견고하게 한정되어 버렸으며, 보다 엄격한 틀 속의 자유로 제한되었다.

결국 자유란 무가 개념 되어지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로 발현된다. 이제 ‘무’조차 실존의 대상이 됨으로써 인류에게 그런 자유는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이상으로 변해버렸으며, 세상 어디에서도 그 누구든 그런 형태의 자유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영원히 잃었으며, 결코 자유의 개념 또한 규정짓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실존, 존재 즉 무를 개념 지음으로서 자유를 사회적 자유의 틀 속에 영원히 가뒀다.

결국 앞의 힐더린의 철학 시는 인간으로 하여금 틀 속의 자유로부터 벗어나는 길, 즉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 진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회복해야만 비로소 인간은 ‘태생적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후 무 혹은 진정한 자유를 잃은 인간은 태생적 비극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갈구하며, 그것을 찾기 위해 긴 유랑의 길을 떠났으나 DNA에 이끌린 채 끝내 그 종착역에 다다르지 못하고, 지금까지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2. 방황

앞에서 인간이 무를 개념 짓자 인간에게 밀어닥쳐 든 것이 곧 질서다. 질서는 인간이 누릴 자유를 틀 속에 가든 상태를 말한다. 그 이전에 이미 인류는 DNA의 속임수에 걸려든, 곧 틀 속 자유에 구속된 안타까운 존재다. 앞서 보았듯이 이로써 인간은 방황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진정한 자유를 찾아야 하는 인간은 자유를 틀 속에 가둠으로서 스스로 진어한 무에의 자유를 영원히 잃었고, 그렇지만 잃어버린 자유를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인간으로서는 기어코 방황하는 존재, 곧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앞서 어렴풋이 말했지만 인류는 지난 2,000년 동안 자유를 개념 짓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끝내 개념 짓지 못하고 있다. 이로써 방황과 함께 인간의 고독은 점차 깊어져만 간다. 고독이 깊어지면 인간은 더 깊은 방황 속에 빠져들게 되고, 그 숫자 또한 크게 늘기 마련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인류는 지혜를 총동원 하고 있다. 그 결과 인류는 하느님이라는 새로운 사상적 자유의 공간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허상의 자유를 개념 짓고,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양 그 곳에 기대어 서 있다.

이천년이 지나도록 인간을 더 큰 구속의 장인 그 곳에 가둘 수 있는 것도 태생적 비극을 떨쳐내려는 종교적 이상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진엊ㅇ한 자유는 분명 인간을 유일하게 행복 속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인간은 비록 개념 짓지는 못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늘 추구한다. 다만 그 진정한 자유란 앞 절 힐더란의 철학 시에 나타난 바로 그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DNA가 인류의 그 같은 행동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實存)이라는 틀 속의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는 것을 죄악시한다. 이후 인간은 이 관념에 갇혔으며, 이미 이것은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아 마치 진리처럼 텃세를 부리고 있다. 이로써 인간은 누구나 이 텃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곧 하느님 즉 종교에 매달리는 일인 것처럼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기 전에는 이 종교라는 새로운 구속으로부터도 탈출하지 못하는,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려다가 오히려 이중의 구속에 직면하고 만 셈이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을 구속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오히려 인간을 더 큰 구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의 고독은 더 깊어지고, 진정한 자유를 향한 인간의 방황은 더욱더 격렬해진다. 인간에게 종교는 구속 속의 또 다른 구속으로, 인간이 일념으로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막고 서 있다.

3. 묘안, 물질의 향연

DNA에 속은 즉 태생적 비극 속의 인간은 지혜를 발휘하여 그 탈출구로 종교를 선택했으나,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오히려 이중의 구속과 함께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막고 서 있다. 이로써 인간은 이제 인간의 것이 아닌 자연에 대한 재 탐사에 나선다. 인간은 본래 자연에 예속된 존재로서, 자연을 숭배해야 한다는, 그래야만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신념은 본능에 기반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 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확신이 그 반작용을 몰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서 말한 종교는 인간 지혜의 산물이지만 그 연원을 따져들면, 즉 인간에게 그 같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 역시 자연이었다.

그러나 그곳으로부터 찾아내었던 종교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보장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오히려 그것을 막았다. 그러자 이에 대한 인간의 반성이 촉발되었고, 인간은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탐사를 시작한다.
이 탐사에서 인간은 온갖 새로운 것들, 즉 우주질서를 비롯해 자연계를 움직이는 힘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의 지혜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고, 오늘 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의 새 시대를 열었다.

이와 함께 인간은 새로운 허상의 자유, 곧 물질을 향유하려는 욕구로부터의 자유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사회적 자유는 더욱더 견고하게 자리 잡았고,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자유를 인간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말로 포장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이름의 자유 또한 인간을 진정한 자유로부터 더 멀리 이격시키는 한편 더욱더 강렬한 구속의 구렁텅이 빠뜨렸다. 이 때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 탐욕이며, 이기심이다. 물론 이간의 이기심 또한 애초 DNA에 희미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것을 강력한 욕구(탐욕과 이기심)로 전환시킨 것이 바로 앞서 말한 새로운 사회적 자유들이다. 이 사회적 자유들은 합리주의라는 이름 하에 명명되었으며, 그 기초는 자연에 대한 재 탐사로부터 얻은 경험의 축적, 곧 이 같은 경험의 축적으로부터 도출한 과학 혹은 과학기술이 그 밑바탕이다.

이 때부터 인간은 한없는 물질적 탐욕에 빠져들었으며, 그것은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던 인간을 물질적 향연으로 초대한 묘약이 되었다. 한편 이 묘약은 인간을 집단으로부터 분리해내기 시작했으며, 개인주의를 더욱더 강화한다. 결국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던 인간은 ‘새로운 자유’의 발견과 함께 개인주의가 짓는 허상의 평화에 빠져든다.

한편 이 같은 개인주의의 신장은 인간을 더욱더 강렬한 탐욕과 이기주의에 빠뜨리고 있으며, 이제 그것이 추구한 물질적 향연의 유희 속에서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그 무엇이 막아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포기한 채, 즉 그것이 곧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고독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다를 버둥거리고 있다. 이로써 인간의 불행은 새로운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이 불행은 종래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향한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제 인간은 이로써 자연으로부터 강렬한 제지를 받기 시작했다. 즉 자연이 인간을 향해 진정한 자유 속으로 모두 돌아갈 것을 강압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4. 성찰

앞서 말한 대로 이제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환경재해라는 이름으로 태생적 비극을 극복할 것을 명령하기 시작했다. 아직 그 초기단계라 인간은 자연이 주는 메시지에 겨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이 때 울려나는 자연의 소리들로 인해 비로소 자기 성찰에 나섰다. 이 성찰은 앞서 말한 새로운 자유로 나타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반성이 아니라 단순히 환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제 개인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 성찰이 전 인류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인류는 여전히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에 갇힌 채 그 같은 성찰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로써 인간에게 태생적 비극을 뛰어 넘는 큰 고통이 시시각각 다가서고 있다. 이 사실을 앞서 자각한 일부 개인들이 목소리를 더 높이며, 인류 앞에 나서고 있다. 그들은 생태환경이라는 말과 함께 생태계를 보전하는 길이 역겹게도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 또한 인간의 태생적 비극만을 뛰어 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이 성찰을 통해 보다 근본적인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서둘러야 하며, 그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해야만 한다. 즉 희랍의 철학시인 힐더린이 말한 그 본연의 자유로 귀환해야한다. 이제 인류는 더는 DNA가 짓는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하며, 허울뿐인 육신이 짓는 물질적 향연이 짓는 기쁨, 그것은 차라리 고통이다, 으로부터도 탈출해야 한다. 마치 종교가 짓는 새로운 이중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듯이 이제 과학의시대가 창조한 새로운 자유 곧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구속으로부터도 전 인류는 반드시 탈출해야만 한다.

5. 귀환

인류적 삶 및 그 방식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은 종래 현재의 왜곡된 자유가 짓는 피폐의 그늘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낼 것이다. 이 때 인류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을 맞는다. 그것은 분명 인류에게 큰 축복이며, 강렬한 영광이다. 탐욕과 이기심이 짓던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다가서든 그 어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를 위해 전 인류가 상기해야 할 것은 DNA로부터 또 다시 기만당하거나 속지 않는 일이다.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 이로서 인간은 늘 꿈꾸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유토피아의 세계에 이른다.

참고) 자유의 개념

‘자유’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꾀나 오래되었지만 인류는 아직 자유를 옳게 개념 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윗 글을 통해 부수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자유의 근본적 개념에 근접하려 했다. 일단 자유가 개념 지어 진 것은 바로 ‘무’에 대해 인간이 새로운 개념을 부여하면서 비롯되었다. 즉 인간은 실존이라는 말과 함께 ‘무’로 하여금 존재성을 갖는다.

이로써 현재 우리가 말하는 모든 자유는 이미 속박된 된 것으로서 진정한 자유의 상태가 아니며, DNA로부터 기만당해 생명을 부여 받는 순간부터 그 모든 것은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전락한다. 즉 각각 반쪽의 유전자인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보다 완전한 DNA가 생성되면, 그 순간 발생과 함께 곧바로 존재의 단계로 이행한다. 이 때 이미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잃는다. 존재자체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되 그것으로부터 속박을 받는다.

결국 인류가 진정한 자유로의 귀환에 나서 성공자다면 우리가 개념 짓지 못한 무속으로 빨려들어야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개념 되어진 무가 아니라 본연의 무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한다.

그곳에는 단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개념 되어지지 않는 무만이 존재한다. 이 말은 곧 자유를 개념 짓는 순간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구슬을 쌓을 수 없듯이 우리는 진정한 자유 또한 결코 개념 지을 수 없는 셈이다.

2009.10.21 시인 정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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