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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30돌, 역사를 추동하는 힘
10.26 사태 30돌, 역사를 추동하는 힘
  • 정 상 편집위원
  • 승인 2009.10.26 0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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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30돌, 역사를 추동하는 힘은 어느 시대나 반드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79년 10월 26일 밤, 몇 발의 총성이 우리사회에 격변을 불러왔다.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리 없는 밤은 그저 침묵했다. 몇 명의 발 빠른 움직임으로 그 몇 발의 총성은 담을 넘지 못했다. 만일 그 날의 총성이 즉각 담을 넘었다면, 직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우리는 아무도 그 일을 알지 못하지만, 일단 등골이 오싹 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 예고되지 않았으며, 우리 국민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건, 우리는 그 사건을 일러 ‘10.26사태’라고 부른다. 그 다음 날인 10.27일 아침, 조간신문은 일제히 일면 머리기사로 ‘대통령 유고’라는 기사를 싫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일은 국민 모두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사실 그 날 밤 최규하 총리 대행체제로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전국의 모든 대학에 대해 휴교조치가 취해 진 것은 물론이고, 이미 군이 전국 모든 대학의 교정을 이미 점거하여 주둔을 완료한 상태였다.

그 날로부터 30년, 그 때 내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우리는 오늘 10.26 사태 30주기를 맞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게 10.26 사태는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30년이라는 세월조차 그 날 아침 내게 닥쳤던 일, 곧 ‘대통령 유고라니 그럼 박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뜻인가?’라는, 큰 충격 속에서 중얼거렸던 그 말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게 울림으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서 30년의 세월조차 그 날, 그 기억을 내게서 앗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철제 대문 앞에 널부러져 있는 조간 신물을 들었을 때, 눈에 확 들어왔던 “대통령 유고”, 뒤이어 도착한 학교 정문, 휴교라는 팻말을 찬 채 교문은 이미 굳게 닫혀있었고, 교문 뒤에는 푸른 제복의 군인들이 총을 맨 채 서 있고, 그 뒤편 교정에는 장갑차, 군용트럭과 함께 군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교문 앞에 동료 몇 명이 서서 웅성대고 있다. 나도 그들 속에 들어섰다. 그리고 전 날 밤,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었으며,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과 그에 따른 휴교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 우리사회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미 국가안전을 담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을 앞세운 군부가 이미 정국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무를 대행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따로 있었지만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면서 그들 모두 유명무실해졌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육군 소장이 맡았다.

이후 전두환 소장은 소위 12.12 사태를 기화로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제압함으로서 실권을 장악하는 데에 일단 성공한다. 이후 전두환 소장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꾸리고, 의장직을 맞는다. 뒤이어 사회정화 운동에 나섰고, 불량배를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권 찬탈에 걸림돌이 되는 인사 대부분을 무작위로 잡아들여 소위 삼청교육대에 보낸다.

이를 통해 전두환 소장은 군과 정권을 모두 장악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진영에서는 서울의 봄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으며, 그로부터 몇 달 후 ‘자유란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기에 이른다. 이 때부터 거국적 학생 운동이 일어난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80년 5월 10일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날 우리는 서울역 광장에 총 집결했다. 그리고 전두환 전 합수부장이 정치적 야욕을 꺾을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 날 우리는 그들에게 속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는 자진해산했고, 이후 교문을 더는 다시 나서지 못했다. 곧 바로 제주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 다시 비상계엄에 준하는 위수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뒤 광주에서는 군과 국민이 무장한 채 대결하는, 소위 5.18 광주사태가 발발했다. 그 날 이후 서울의 봄은 새로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이후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전두환 장군은 고속 승진 끝에 80년 8월 육군대장직에서 예편함과 동시에 ‘제 11대 대통령에 피선(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되고, 그 해 9월 제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듬해 2월 전두환 대통령은 다시 제 12대 대통령에 피선되었고, 이후 88년 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이러는 사이 내 생활도 크게 변해 있었다. 5.18 사태 직후 나는 휴교해야 했고, 이듬해인 81년 6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군대 생활 2년은 나의 모든 일상을 바꿔놓았다. 83년 10월 전역을 했을 때, 나와 함께 역사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었다. 바로 전두환 군사정권이 국민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정권을 착실하게 다져나갔다. 현재 국민의 사랑 속에 붐을 타고 있는 프로야구가 이 때 탄생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이어졌던 군사정권은 과도정부로서 기능을 다하고 역사에서 물러났다. 그것을 추동한 것이 바로 86년에 있었던 소위 6.10 민주 항쟁이다. 6.10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의 쟁취와 함께 이 땅에 소위 민주화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그리고 현재의 이명박 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정부는 모두 87년 체제에 기반한 제 6공화국 정부로서 비록 정부의 색깔이 다른 것 같지만 실은 같은 헌법적 지위 위에 서 있다.

10.26 사태 30돌, 역사는 그 큰 충격을 극복하고 오늘도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고 있다. 이게 대한민국의 참 모습이다. 어찌되었든 이 같이 역사를 추동하는 힘은 언제나 반드시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이는 우리 국민 모두가 자부심을 가져야 할 분명한 이유이다. 바로 이 땅, 우리 역사의 주인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이는 당신 자신, 곧 우리 국민들인 셈이다. 역사가 위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00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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