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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사다리, 국민통합을 위한 제언
세조의 사다리, 국민통합을 위한 제언
  • 정 상 편집위원
  • 승인 2010.01.2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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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세조 연간의 이야기다. 조선이 신분제를 유지한 봉건국가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분제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애초 그 등급이 매겨진다는 점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왕가에서 태어나면 왕족으로 최상위 계급에 속하게 되고, 중인 가에서 태어나면 중인으로, 노비 가에서 태어나면 노비로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
인권을 특히 중시하는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같은 제도를 떠올리면, 정말 어이없다. 아직도 일부 유지되고 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생각하면, 사실 우리 모두 더더욱 어처구니없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그 같은 사회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 누구든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그 같은, 즉 충분히 비합리적인 사회제도로서의 신분제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신분제 사회, 혹은 신분제 사회제도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거 조선 사회에도 소위 사회를 리더 하는 정치세력이 있었다. 소위 양반계층 중에서도 정치적 권위를 가진 권문세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 권문세가는 왕의 권위를 등에 업고, 절대적 권위를 유지했는데, 문제는 왕의 권위를 등에 업고자 그들 간의 세 대결이 정말 엄청났다. 조선사회를 붕괴시킨 소위 붕당정치가 그것을 실증한다. 사실 왕이라고 하여도 그들 간의 세 대결을 잘 조정하지 못하면 왕의 지위조차 유지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세조 연간의 이야기다. 아마 당시 권문세가를 이루던 두 가문사이에 혼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혼인이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단순히 선남선녀만의 만남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곧 가문과 가문의 유대를 결정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당시 백중지세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가문이 혼인을 하는 데에까지는 사실 상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신행 후 첫 날 밤을 지낸 신랑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신부 측에서는 있어야할 새신랑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란다. 새신랑 행처를 수소문 끝에 확인한 결과 초야를 치룬 새신랑이 아무 말 도 없이 자신의 집에 돌아가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여 사람을 보내 신랑에게 그 사유를 물을 즉 대꾸는 없고, 자꾸 차일피일 시간을 끌며 횡설수설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두 권문세가 간에 큰 싸움까지 벌어지고, 급기야 이 동네 저 동네로 그 소문이 옮겨가기까지 했다.

사연은 이랬다. 초야를 치룬 새신랑이 곧 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 간 이유가 새신부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신부 측 입장에서는 그런 신랑의 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밤마실은커녕 평소 바깥출입조차 엄격히 제한 당했던, 그것도 권문세가의 여아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은 양가 모두에게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튼 두 권문세가는, 이 혼인이 파국에 이름으로 인해 정말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그 집안싸움이 세조의 귀에까지 전해진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세조는 두 가 문중 어느 가문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정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물론 왕권을 들어 강제조정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니면 기회는 이 때다하며, 한 쪽 가문을 내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방법 중 어느 방법도 일시적으로 평정을 되찾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해결할 경우 두고두고 문제로 비화될 새로운 성질의 사건을 하나 더 만드는 꼴이 된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두 가문이 모두 수용해 화평을 이룰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내 이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세조의 사다리’이다. 아무튼 세조에게는 문제의 본질인 신랑 측의 처녀가 아니라는 주장과 신부 측의 처녀라는 주장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묘안이 필요했다.
결국 세조는 사람을 보내 신부 측 집의 구조, 특히 규수가 기거하던 방의 구조를 그려오라 해 그것을 유심히 살핀다. 그러다가 선장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규수가 기거하던 방에는 다락방까지 있었는데, 바로 다락방으로 오르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세조는 ‘옳거니, 바로 저 사다리를 처단하면 되겠다.’며, 무릎을 탁 친다.

너른 궁전 앞뜰에 신랑과 신부, 그리고 양가를 함께 부른 후 세조는 신부 댁 집안 구조를 소상히 그린 도면을 앞에 펼쳐 놓고 다음과 같이 처결한다.

“신부는 처녀가 아니되 처녀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이 사다리에게 있음으로 오늘 이 사다리를 벌함으로써 이후 양가는 더욱더 돈독하게 지낼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는 세조는 신랑을 자신 앞으로 부른 다음 신부 집 구조를 그린 도면을 보여주며, “신부의 처녀성을 뺏은 것은 바로 이 사다리다. 신부가 바로 이 사다리를 오르내리다 처녀성을 잃었다. 하여 신랑은 신부의 처녀성을 의심치 말라.”고 당부했다.

이 같은 세조의 권고를 듣고 신랑은 신부를 이해했고, 신부 또한 신랑을 이해해, 이후 이 선남선녀는 훌륭한 가정을 꾸린 것은 물론이고, 이후 양가는 더욱더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고 했다.
바로 이 세조의 지혜를 우리의 위정자들 또한 가슴에 새겨야한다. 만일 세조가 마음이 가는 쪽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면 양가의 싸움을 더욱더 크게 확대되었을 것이고, 이후 정국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조 연간의 이 이야기를 통해, 적어도 위정자는 각종 사회현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국민통합의 관점에서 각종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물론이고, 특정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국민통합을 실현 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이런 점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매우 박약한 반면에 가급적 대립적 혹은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다. 최근 세종시 원안수정과 관련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정치권의 모습을 볼 때, 문득 의정자로서 세조의 지혜가 아쉽다. 특히 여당 내부의 갈등, 즉 이명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정몽준 대표와 박근혜 던 대표와의 대립각은 여당으로서 한나라당의 자질을 크게 추락시키는 일로서 국민을 크게 당혹케 한다.

지금 우리의 정치는 세조의 사다리를 재발견해야 할 때다. 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대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덕목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이다.

20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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