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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찌비시 3년이 넘게 착취한 노동의 대가가 겨우 99엔(한화1.230원
미찌비시 3년이 넘게 착취한 노동의 대가가 겨우 99엔(한화1.230원
  • 유성경 기자
  • 승인 2010.02.08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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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찌비시 3년이 넘게 착취한 노동의 대가가 겨우 99엔(한화1.230원)

-66년 전 그들의 염치없고 치졸한 만행을 엿보다
-양금덕 할머니, “악착같이 살아야겠다. 밥 한술이라도 더 먹고 기운을 내서 싸우겠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찾은 양금덕 할머니. 할머니는 야위셨으나 8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하셨고 경로당에서 식사준비를 대가도 없이 무료로 봉사하시고 댁에서 우리를 맞아주셨고 집안은 냉기로 가득했다.

유난히 추운 올해 겨울 집안은 실외온도보다 체감온도가 낮게 느껴졌고 앉아서 숨을 쉬면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할머니 왜 이렇게 추워요? “기름이 떨어져서 보일러를 못 떼!”라고 하신다.


▲ 단 2년의 일본 근로정신대 활동으로 인해 양 할머니는 평생을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으며, 할머니의 인생 자체그 그 2년으로 인해 굴곡진 삶을 살고 있다. ⓒ사진=조정삼 기자

할머니는 1944년 있었던 자신의 겪은 사연을 풀어놓으셨다. 당시 여느 때와 같이 국민(초등)학교를 다니셨던 할머니는 5월 20일 일본헌병들이 와서 중학교 공부를 시켜주고 잘 먹고 돈도 잘 벌게 해주겠다며 모집을 했는데, 반에서 급장(반장)을 맡고 있었던 할머니는 중학교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중학교를 보내줄 만큼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일본으로 떠나기를 결심했다.

반 전체 58~60여명 전체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으나 선별된 인원 중에 할머니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부모님의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오기를 요구했고, 아버지께 도장을 찍어달라고 얘기했으나 일본은 대동아 전쟁이 나서 나라가 어지러우니 거기가면 큰일 난다며 극구 반대를 하셨다.

일본 헌병한테 부모님이 반대해서 못가겠다 하니 일본헌병이 “정한 일이기 때문에 가야한다. 너희 부모 감옥에 가둬버린다”고 협박했다. 그래서 도장을 몰래 훔쳐서 서류에 찍고 가는 날짜에 맞춰서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둘 학교에 가져다 놓고 일본으로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모아진 인원이 (1년 선배:7명 2년 선배:7명) 광주, 전남(나주, 목포, 순천, 여수)에서 138명, 충청남도에서 150명 우리나라에서 총 188명이 선별이 돼서 일본을 향해 갔다.



▲ 양금덕 할머니가 일본으로 끌려가 작업에 투입되기 전 기숙사 문전에서 훈시를 받고 있다. ⓒ사진=조정삼 기자

기차로 출발하는 날 기차에 몰래 숨어들어 언니를 통해 소식을 들은 부모님께 기차역에서 찾고 헤매는 모습을 출발할 때까지 지켜보고 출발한 후에야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잘 다녀 오께!” 하며 부모님의 통곡하는 소리를 멀리하고 떠났다.

처음 일본에 도착하여 아슬이라는 쇠(비행기 부속)를 깎는 도구로 요구하는 센티만큼을 깎아 내고 “여기가 중학교예요”라고 물으니“이걸 배워야 학교에 갈수 있다”했다.

공장으로 보내어져서 비행기 날개에 페인트칠을 하고 고된 노동에 구타에 배고픔에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지면서 월급은 왜 안주냐고 물으면 “다 저금해 놓았으니 걱정마라”하고 중학교는 언제 가냐고 물으면 “내년에 간다. 내년에 간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거기서의 생활은 아침 6시 기상하여 아침을 먹고 일을 했고 공장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5시~6시가 돼서 일이 끝나고 8시에 저녁 식사를 하고 10시가 돼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도야마 군수공장에서 해방을 맞았다. 8월 15일 이 되었는데 여느 때처럼 일을 하란 소리가 없어 가보니 라디오에서 일본천왕이 우는 소리가 났고 원자탄 2개가 히로시마에 떨어져서 폭발한 소식을 몰래 듣게 됐다. 해방의 소식은 들었으나 보내주지 않았다.

“날마다 울어라 그렇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 학생들은 일제히 물에 빠지겠다고 협박했으나 나와 보지도 않았다. 수차례 연락이 닿은 뒤에야 “집에 보내 주겠다. 지금 죽으면 집에도 못 간다” 라고 약속을 받았다.

철저한 인원 파악과 감시가 이뤄졌고 배고픔과 구타는 견디기 힘든 나날 이였다. 44년 12월 7일에는 큰 지진이 났고 몇 명이 희생되었고 그 후 6개월을 더 일한 뒤 귀향할 수 있었다.

영산포 야간학교를 다니다가 안다니고 17~18세 즈음에 혼인 제안이 들어왔고 선을 보고 동네 가서 집안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 집 큰딸 일본 갔다 왔어”하면 두말 안하고 달아나 버리기를 수차례…

주변의 따가운 시선들과 편견에 아버지는 술만 드시고 3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그 후 남편을 만나고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고 기르던 28세의 어느 날, 일하고 돌아온 남편이 “일본 유학 갔다더니, 일하고 몸 팔고 왔다며?”하며 외도를 하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8년 후(36세)에 아는 형님 아이들인데 잠시 맡아 달라 했다며 아이3을 데리고 왔다.
광주에서 같이 살다가 남편은 사별했다.

요즘 미쯔비시 퇴출운동에 신이 난 할머니는 “돈 안 받더라도 시민들이 관심 가져 준 것만으로도 좋다. 누가 언제 물어보기나 했나?”고 하시며 정부에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노인에게 한을 품고 가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하셨다.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일한 임금을 받아서 어머니 아버지 비석이라도 세워 드리고 싶다고 하셨다.이 사연을 접하면서 이것은 개인이나 기업의 욕심이 낳은 산물임을 알게 되었고, 뉴라이트 등 역사의 왜곡, 미화하는 단체들이 판을 치는 현 사회에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가 품고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할머니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실질적인 도움이 절실하다. 우리가 관심 갖고 사랑해야할 이웃이다. 안기자님 처럼 주머니를 비워줄 용기만 있다면 세상은 더 따뜻하고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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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박애순 수습기자 cala181028@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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