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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드롬, 우리 모두는 정의를 넘어 숭고한 삶의 모습을 되찾아야한다.
정의 신드롬, 우리 모두는 정의를 넘어 숭고한 삶의 모습을 되찾아야한다.
  • 정 상 편집위원
  • 승인 2011.02.07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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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드롬, 우리 모두는 정의를 넘어 숭고한 삶의 모습을 되찾아야한다.

최근 정의 신드롬이라 할 만큼 이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의 한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내는 한편 그의 정의에 대한 강의가 한국에 소개되면서 이런 신드롬을 열었다. 하지만 <정의>를 뛰어 넘어야 할 이유가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박애>라는 말을 잊고 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사회적 강요’에 의해 그것을 아예 잊기까지 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의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며, 정의로운 사회야 말로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책 혹은 강의에서 보듯 정의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이처럼 정의에 집착하는 것도 그것이 공정한 사회를 여는 준거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의가 열어 줄 것이라고 믿는 공정한 사회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사회는 결코 정의에 기초한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아름다운 사회는 숭고한 정신을 소유한 자들의 사회다. 즉 숭고한 사람들이 짓는 숭고한 사회야 말로 우리가 소망하는 아름다운 사회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강조해야 할 덕목이 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앞서 강조한 박애(博愛)다.

사회는 한 때 박애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사회의 경향은 오래가지 못했고, 자본주의사회의 진전과 더불어 점차 잊혀 져 가다가 현대사회는 마침내 그것을 사실 상 완전히 잊었다. 박애가 잊혀 진 그 자리를 정의(正義)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박애가 강조되던 기존의 잊혀진 사회 경향을 되찾아 잊어버린 박애주의 사회를 다시 건설해야 한다. 정의가 질서 정연한 사회, 곧 공정한 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 모두의 행복을 결코 담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정의가 우리로 하여금 결코 행복한 눈물을 짓도록 하지 못한다. 이 점을 깨닫기까지 우리는 정의를 더 오래도록 부르짖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견고하게 지켜 낼 마지막 수단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간이 가급적 짧았으면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하면 정의가 강조되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를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존의 사회를 구현해내지 못한다. 즉 현실에서 경제적 자립 능력이 전혀 없는 한 아이가 배가 너무도 고픈 나머지 한 조각의 빵을 훔쳐 먹었다고 치자. 그 누가 정의를 앞세워 그를 단죄할 수 있는가?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아이에게 빵을 나눌 수 있는 공존의 덕목을 잘 구현해 내는 일이다. 너무도 배가 고픈 아이는 빵집 주인 몰래 한 조각이 아닌 배가 차도록 빵을 훔쳐 먹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아이의 죄를 단죄하기 전에, 즉 우리 모두는 그 아이가 배를 곯지 않도록 사전에 그 아이를 도와주었어야만 한다. 이는 풍요 속의 빈곤을 열어 놓은 현대사회의 문제이지 그 아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소하자면 박애(주의)가 실천적 덕목으로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배가 너무도 고픈 아이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더불어 우리 모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인류애)을 실천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이를 성인(군자)의 덕목으로 여겨왔다. 즉 그 동안 박애(주의)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 덕목으로 자리매김 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의는 질서와 규칙을 지켜내는 데 필요한,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정의는 우리가 아니라 너와 나를 경계 짓는, 곧 개인의 행동을 규율하는 사회적 규제의 수단이다. 이에 비해 박애는 사랑을 실천하는, 곧 개인으로 하여금 어려운 지경에 처한 타인을 보살피도록 하는 향기로운 마음을 여는 동기다.

이런 마음에 기초한 개인행동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조차 걷어내고, 우리 모두로 하여금 ‘공존공영(共存共榮)’이라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회적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뛰어넘어 숭고한 사랑이 실천되는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해 낼 수 있다.

이처럼 현대 사회는 박애를 요구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앞서 지적한 대로 그 동안 박애(주의)를 잊고 있었다. 너와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사회가 짓는 정의에 기초한 각종 경계 때문에 늘 불안에 시달려 왔다. 이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혹여 정의를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분명 개인주의 혹은 자유주의에 기초해 있고, 그것을 지탱하는 모든 힘은 각종 규율과 사회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정의로부터 파생된다. 이처럼 공정한 사회를 열 것이라고 기대한 정의는 오히려 너와 나의 경계를 명확히 구획하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이제 그 같은 경계를 구획하는 선을 유지하되 그것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생각과 행동을 되찾고, 또한 그것을 구현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박애이다. 우리는 박애주의 사회의 부활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 누구나 믿고 살 수 있는 편안하고 행복한 사회를 반드시 건설해야 한다. 이런 유로 지금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박애주의 사회의 부활이다. / 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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