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5:35 (금)
열반(涅槃)지경, 인간은 누구나 죽어 아름답다.
열반(涅槃)지경, 인간은 누구나 죽어 아름답다.
  • 정 상 편집위원
  • 승인 2009.08.22 11: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검(송장, 시체)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하면, 다들 의아해 할 것이다. 시쳇말로 시체(屍體)를 두고 아름답다고 말하면, 누가 이 말을 믿으려 들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시신의 모습은 정말 평안하며, 급기야 갓 시집 온 새색시 화장기 없는 얼굴처럼 뽀얀 것이 정말 아름답기까지 하다. 나 역시 일찍부터 이 사실을 안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장모님 상을 치르던 중, 주검으로 누운 장모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아름다움에는 남녀 구분 또한 없다. 더군다나 그 얼굴에 약간 분칠 덧 하면, 그야 말로 절세가인(絶世佳人)이 따로 없을 정도다. 앞서 말한 장모님 역시 마찬가지셨다. 이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내 말에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주검을 가까이서 본 이들은 한결 같이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 나는 지금 ‘객관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시신이 부패하거나 기타 아주 특별하게 죽음을 맞이한 경우는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고사를 당했거나 기타 약물에 의해 사망에 이른 경우, 혹은 익사, 기타 목을 맨 경우 등은 예외일 수 있다.

그러나 생로병사라는 생명 순환 끝에 자연스럽게 도달한 경우 즉 정상상태로 죽음에 이른 이의 주검은 그야 말로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아름답다. 지금 유리관 속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역시 평온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파란의 삶을 산 이도 드물다. 주검으로 누운 그런 그분의 모습이 하(何)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는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6개월 여 전 주검으로 누운 고 김수환 전 추기경의 모습 역시 평안하지 않던가? 그분 또한 생전의 고생담을 듣고 있노라면 참으로 눈물겹지 않던가? 내 장모님 또한 곡절 많은 삶을 사시다가 지난 3월 갑작스럽게 병환을 얻어 불과 3개월여 만에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신 모습이 너무나 고우셔서, 내 일찍이 그 같이 고운 장모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했다.

이처럼 어느 누구의 주검이든지 간에 주검은 항시 아름답다. 하지만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것 또한 바로 이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시라든가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어느 누구든 주검을 대할 일이 일생동안 고작해야 두어 번 내지는 대 여섯 번이 전부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의식 속에 사체에 대한 매우 충격적인 편견만을 심어 놓았다. 즉 사체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라는 왜곡이 그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주검은 왜 평안해보이며, 또 아름답기까지 할까?

애써 그 이유를 추정해 말하면 모든 생명체는 생명현상이 중지되면, 그것을 지탱하던 모든 힘들이 점차 소멸한다. 즉 인간 신체의 경우 일단 주검이 되면 모든 근육의 긴장이 맨 먼저 이완된다. 특히 얼굴은 전체가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로 인해 웃음, 미소, 냉소, 찡그림, 화난 모습 등 변화무쌍한 표정들을 지을 수 있다. 이로써 생전 얼굴 근육은 어떤 형태로든 항시 경직되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짓는 미소조차도 경직된 근육의 작용으로부터 나타난 생명현상이다.
그러나 주검이 되면 그 동안 생명현상으로 인해 경직되었던 얼굴 근육 대부분이 모두 이완된다. 이로 인해 경직된 얼굴은 사라지고 아주 자연스러운 얼굴 모습만 남는다. 이는 주검의 표정이 한 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에 더해 그 동안 몸을 붉게 했던 혈액의 적혈구 역시 사망에 이르면 제 빛을 잃는다. 이로 인해 주검의 색 또한 새뽀얗게 된다. 이러니 주검의 표정이 어찌 평온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가?

아무튼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사람은 누구나 죽어 아름답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로서 진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생각 속엔 시체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편견은 그것을 자주 대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며, 급기야 ‘시체를 경외시하는 또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실 어느 민족이나 부장의 형태는 다르나 이와 관련한 습속은 거의 비슷하다. 즉 어느 민족이나 주검을 경외(敬畏)시 한다. 이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이다. 이 같은 인간의 생각은 인간을 영험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앞 절에서 지적한 ‘시체를 경외시하는 또 다른 이유’란 바로 앞 문장에서 지적한 영험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예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죽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기를 언제나 소망한다. 그리고 신은 인간의 이 같은 뜻을 존중해 어느 위치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진지하게 삶을 개척한 모든 이들에게 죽어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한다. 열반(涅槃)이란 말 역시 이를 전제한 말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면 세속에서 지녔던 그 모든 것을 놓고 떠난다. 그렇게 사랑했던 아내도, 자식도, 재물도, 명예도, 지식도 하물며 자신의 육신까지도 모두 놓고 떠나야 한다. 해탈(解脫)의 경지란 어쩌면 주검으로 누운 인간의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경이로운 세계, 곧 열반(涅槃)의 세계인 셈이다.

탐욕에 기초한 인간의 이기심은 생명을 유지하고 추동시키는 근간이지만 이로 인해 인간의 모습을 항시 최악의 상태로 만든다. 그러나 주검으로 눕는 순간 인간은 ‘그 모든 것(생명현상들)’들로부터 벗어나 해탈(解脫)의 경지(境地)에 도달한다. 이 때 다다른 세계가 곧 열반(涅槃)이다. 열반(涅槃)에 도달한 인간(人間)의 모습은 평온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한 대로 생명 현상이 짓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비로소 자유롭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허용한 영원한 자유는 죽음으로부터 얻는 최상의 경지, 곧 열반(涅槃)지경인 셈이다.

2009.8.2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