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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들 깨어 있다.
역사는 들 깨어 있다.
  • 정 상 편집위원
  • 승인 2009.08.28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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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7년 체제의 등장

2. 87년 체제의 등장

해방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 64년의 기간 중 미군정기 3년을 포함해 이승만과 윤보선, 그리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정치 후진의 시대가 종언을 구한 것은 소위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의 종언을 강제한, 79년 발생한 궁정동 사건, 소위 10.26 사태의 주범이자 장본인)’라는 무모한 도전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사건에 대해 김재규는 조사받는 과정에 '민주회복을 위한거사였다'고 주장했다.

팩트와 상관없이 이 사건은 사가(史家)에 따라 달리 헤석될 수 있다. 사가는 이 사건이 몰고온 후폭풍과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소위 궁정동 사건이라 불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개인감정에 의한 단순 우발적 사건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가 그렇게 나설 수 있었던 직간접 동기 또한 고려에 넣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 사건은 그 동안 한국정치의 흐름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10월 유신을 선포한 1972년 10월 이후, 이 이전의 사회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한국사회가 반정부 시위로 요동치고 있었다. 즉  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과 함께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을 포함하여 억눌린 민주화에 대한 민중의 요구가 전국 도처에서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분출되고 있었다.  급기야 79년 10월 16일로부터 20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발생했던 소위 ‘부마사태’는 박정희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당시 이 사태에 대한 국가 주요 권력기관 간의 시각 차 또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김재규는 이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한 기관별 시각차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새로운 선택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그 이전의 일이었지만 한 때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생각까지 했으나, 당시 주변 실세들이 이를 적극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부마사태가 발생한 지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당시 중정부장이던 김재규는 앞서 말한 소위 궁정동 사건의 당사자로서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중심에 스스로 섰다. 이로써 소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박정희 정권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점철되었든 이 땅의 군사 독재정치의 시대가 종언을 구하는 서막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의 방향으로 진전되는 역사조차도 때로는 아둔해 질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 반증하듯 소위 궁정동 사건으로 활짝 열릴 것 같던 한국의 봄은 또 다시 신군부의 등장으로 꽃 봉우리만을 맺은 채 시들어 가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까지 한국정치에 새 길을 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두 사람이 있었으니, 그 중 한 사람은 김영삼이며,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지난 18일 오후 1시 43분에 타개한 김대중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의 민주화 투쟁 전력과 관련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 또한 있다. 즉 두 사람 모두 정권에 의한 일방적 탄압의 대상으로서 이로 인해 오히려 명성을 얻었을 뿐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무책임한 것으로서 저들이 실제행동에 나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많은 국민이 그가 던지는 메시지를 통해 군사독재의 실체적 진실을 바로 알게 되고, 이에 분개해 행동에 나섰다면 이 또한 민주화 노정에 큰 공적을 쌓았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앞서 말한 부마사태의 중심에는 자의든 타의든 김영삼이라는 소위 당시 신민당 총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된 이후 한국사회는 각종 시국사건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박정희 군사정권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체포, 연행, 연금을 밥 먹듯 했다. 이른 악마의 상태가 진행되던 당시 소위 YH 여성노동자 농성 사건이 발생했고, 이들은 신민당 당사에서 철야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에 대한 제명이 국회파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에 분개한 부산대학교 학생 5,000여명이 ‘유신정권 물러나라’는 구호와 함께 거리투쟁에 나섰고, 급기야 일반시민과 중/고등학생까지 이 시위에 가담함으로서 이 지역의 치안부재현상까지 나타난다. 급기야 박정희 정권은 이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하기에 이른다. 이 때 약 1,000여명이 이상이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이후 시위는 더욱더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급기야 마산 창원 지역의 노동자와 시민까지 반정부 시위에 가담한다.

부산의 경우 계엄령의 선포로 어느 정도 거리질서가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이제는 마산 창원 지역이 치안부재의 상태에 이른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마산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내리는 한편 시위참가자 500여명을 또 다시 체포/연행한다. 그리고 이들 중 약 60여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등 강경진압에 나섰다.

이로써 소위 부마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이 사태는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시각에 바로 박정희 군사 정권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마산 창원 지역에 위수령이 내려진 것이 바로 그해 10월 20일이었다. 그로부터 6일 뒤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을 향해 권총을 발사해 그들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열리려던 한국은 봄은 소위 10.26 사태에 대한 수사에 나선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등장으로 또 다시 좌절하고 말았다. 사실 이 시기까지 이 땅의 정치중심에는 박정희와 함께 김영삼이 서 있었다.

물론 김대중이라는 출중한 정치인이 있었지만 그는 군사정권의 폭압에 눌려 그 어떤 정치활동조차 제대로 전개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새 날이 열리고 있었다. 바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한 때 사형을 언도 받기도 했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역사전개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전두환은 그를 급기야 청와대로 불러 말의 물꼬를 틈으로서 그 자신 스스로로 하여금 6년 단임을 실천할 수 있게 했다.
하기야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정치기반인 ‘광주시민의 피(5.18 광주민주화 운동, 1980년)’을 머금고 탄생했다. 이로 인해 광주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서는 결코 전두환 정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김대중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로 김대중을 초청했다(재임시절의 김대중 대통령 역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 자주 대담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전과 김 두 사람 간의 화해는 이 때 이미 이루어 진 셈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단임을 실행에 옮긴 것 역시 이 때 이미 결단이 내려진 상태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비록 6.10(87년) 항쟁이라는 민주화 투쟁이 전개된 데 따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5년 단임과 함께 소위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 그리고 이 해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의 두 중추세력의 중심인 두 사람, 즉 김대중과 김영삼은 끝내 단일화에 실패했고, 종래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서 소위 이 땅의 민주화는 또 다시 5년 후로 미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정치는 소위 3당 합당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탄생시킴으로서 민주화 세력의 분열과 함께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지평 또한 완전히 변해버렸다. 이 땅 정치세력의 정체성에 큰 혼란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이후 김대중은 정계은퇴 선언과 함께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후 DJP 연합 등으로 한국정치가 급변하면서 한국 정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정부의 탄생과 함께 현재의 구도로 자리 잡았고, 정권의 수평적 교체가 본격 이루어지는 등 민주주의의 절차적 완성과 함께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어찌되었던 노태우정부로부터 현재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소위 87년 체제에 기초한 제 6공화국의 등장으로 한국 민주주의 절차적 완성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87년 체제는 군사독재정부의 연장선상에 있던 전두환 정권과 민주화 세력 간에 서로 약간씩 양보함으로서 탄생했으며, 민주주의 형식은 갖췄으나 대통령에게 여전히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서 미완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와 함께 현행 행정체제라든가 기타 앞서 말한 권력구조 등의 면에서 일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셈이다.

지난 정부에서 제기했고, 현재 재논의 필요성이 제기된 행정구역 개편론과 권력구조 개편은 맞물려 있으며, 성숙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개헌 또한 불가피할 전망이다. (계속)

3. 민주주의의 진전 

4. 개헌, 이명박 정부 이후의 정부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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