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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십자군전쟁의 영웅 리처드왕과 술탄 살라딘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십자군전쟁의 영웅 리처드왕과 술탄 살라딘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2.11.25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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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킹덤 오브 헤븐’ 영화의 명대사 중에 전투가 끝난 후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라는 리처드 1세 휘하 장군 발리앙의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야. 모든 것이기도 하고!" 라고 답변하는 살라딘의 대사가 기억 난다.

살라딘은 리처드 1세와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하는 말 “아무리 최정예라고 하지만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보였다” 살라딘은 리처드의 엄청난 전투력과 리더십에 찬사를 보냈다.

리처드 말이 죽자 비록 적이지만 말이 없이 싸울 수 없다며 최고의 명마를 그에게 보냈다. 리처드 왕 또한 살라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전쟁 속에 피어나는 상호존중의 모습을 연출했다. 

1192년 10월, 살라딘 앞으로 편지가 하나 도착했다. 발신자는 리처드 왕.

“술탄이여! 당신과의 승부, 끝을 보지는 못했지만 참으로 멋진 승부였소. 부디 건강 챙기고 계시오. 내 반드시 전열을 정비하여 돌아올 것이니. 그때는 각오 단단히 하시길…” 이에 살라딘도 리처드 왕에게 답신을 보냈다.

“콜! 내 기다리겠소. 만약에. 그럴 일 없겠지만 내가 혹시라도 예루살렘을 어떤 이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그 어떤 이가 당신이었으면 좋겠소.”이 둘은 끝내 재회하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이 낳은 최고의 두 라이벌이 죽고 나서도 십자군 전쟁은 이어졌다.

INTRO: 십자군 전쟁의 영웅, 사자의 심장 리처드와 고결한 이교도 살라딘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이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다.

십자군의 태동 원인은 종교적 배타성이지만, 한편으로는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과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2000년,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은 가톨릭의 십자군 전쟁을 사죄했다.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고 해서 사자왕으로 불리던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세계 최대의 유랑 민족 쿠르드족인 출신 살라딘과 싸웠지만 서로 완전히 궤멸하지는 못했다.

1192년 살라딘은 십자군을 지중해 연안 지역까지 몰아냈고, 십자군은 기독교인들이 살던 다수의 성을 탈환했다. 양측 군대 모두 지친 상태로 휴전 협정을 맺었다.

양측 모두가 각자 현 상황 그대로를 유지하고,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까지 자유롭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다고 보장받은 것이다.

힘으로 당해낼 자 없던 천하장사 사자왕 리차드(1157~1199)

역사상 가장 뛰어난 용장, 중세 유럽 최고의 전략가. 1188년, 아버지를 배신한 후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국왕에 오른 리처드 1세는 자기를 도와준 공신들을 대대적인 숙청하고, 십자군 원정에 가고 싶어 군자금을 마련코자 왕가의 땅을 팔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리처드는 십자군 전쟁에서 전술과 전략의 대가였고, 공성전의 천재였으며 병참과 보급의 달인이었다.

당시 십자군의 건강을 위협했던 것은 (1) 영양 결핍으로 인한 피로감, 괴혈병, 면역력 저하 (2) 과밀집과 비위생 (3) 시신에 오염된 식수 (4) 홍수, 잦고 급격한 온도 변화 (5) 말라리아가 창궐 등이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지휘를 강행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용감하고 전략가였던 ​사자 왕의 전쟁 끝나고 귀국길은 가시밭길이다. 리처드의 고집과 독선적인 성격으로 유럽 여러 왕들이 싫어했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공작에게 붙잡혀 신성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에게 팔아넘겼다.

리처드는 게르만 민족의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잉글랜드는 국왕을 석방시키기 위해 몸값 15만 마르크를 내고 2년 만에 풀려났다. 프랑스와 전쟁 하던 중 리처드는 초저녁 갑옷을 입지 않고 성벽 가까이 거닐다가 석궁 화살에 맞아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십자군을 물리친 무슬림 세계의 영웅 살라딘(1137~1193)

살라딘은 1137년 제2차 십자군 전쟁 때 다마스쿠스 방어군 사령관으로서 유럽군을 패퇴시키고 그 지역 총독이 된 아이유브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집트는 파티마 왕조로 시리아, 수단, 아라비아반도까지 지배했었다.

1174년, 살라딘은 260년간 이집트를 다스려 온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권 전역을 지배하는 진짜 왕이 되었다.

살라딘은 1187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다. 보복 없이 예루살렘 탈환했다. 이 도시가 십자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은 아랍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던 것과는 정반대 현상으로“기독교인들처럼 상대편을 죽인다면 이슬람교도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패전에 충격을 받은 유럽은 리처드왕을 내세워 십자군 3차 전쟁을 시작했다. 리처드와 살라딘은 상대방을 호적수를 넘어 영웅으로, 영웅을 넘어 친구처럼 생각했다.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와중에도 상대방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갖고 있었다.

살라딘의 기사도적인 행동은 단테의 〈신곡〉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가장 가벼운 벌을 받는 고결한 이교도로 그가 등장한다.

살라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이다. 살라딘은 1193년 전쟁을 끝내고 얼마 안 돼 눈을 감았다. 광활한 제국을 지배한 술탄답지 않게 검소했던 그의 수중에는 무덤 하나 세울 돈조차 없었다.

에피소드: ‘참된 용기와 의로운 전쟁 영웅’

# 살라딘은 참된 용기와 두터운 신앙심을 가진 의로운 전쟁영웅으로 전투 중에 조카가 죽었다고 엉엉 울었다.

# 살라딘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왔지만, 자신을 배반하는 사람에게는 용서 없는 처벌을 가했다. 자신의 사위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독살해버렸다.

그러나 온정이 많았던 살라딘은 아버지를 잃은 외손자를 세심하게 배려했다. 외손자에게 코란의 한 구절을 암송시켰다. “고아들의 재산을 부당하게 삼킨 자는 자신의 뱃속에 불을 심는 것과 같다. 자신도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인다.”

어록: 문명의 화해자 살라딘

"세계가 창조된 이래로 우리는 그렇게 용감하고 그렇게 무기를 잘 다루는 기사를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살라딘 부하

“리처드는 자신이 준비되지 않은 것은 다른 병사에게도 시키지 않았다. 일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솔선수범해서 일했다. 왕이든 귀족이든 기사든 종자든 모두 함께 손으로 돌과 바위를 나르며 일했다.” -앙브루아즈

“짐은 야심을 성전 기사단에게, 탐욕을 수도자들에게, 그리고 쾌락을 고위 성직자에게 맡기노라.” -리처드 1세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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