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7:30 (토)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비폭력 불복종 투쟁의 원조 간디(1869년~1948년)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비폭력 불복종 투쟁의 원조 간디(1869년~1948년)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2.12.02 16: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진혁 작가] 인도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 인종차별운동을 통해 인도 건국을 이룬 아버지. 사티아그라하투쟁(Satyagraha 원뜻은 '진리를 위하여)을 조직하여 반영 독립운동과 개인적 불복종운동을 이끈 마하트마로 불린다.

INRTO: 인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정신(mahatma)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서 세계 최강의 무력국가 영국에 맞서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맞섰다. 당시 글도 모르고, 다민족 다종교로 갈가리 찢겨 있던 대중의 존엄과 역사를 바꾼 것이다.

간디는 물레를 돌리면서 영국 물품 배척 운동에 동참했다. 간디의 말 한마디에 국민 전체가 통일된 행동을 보여 영국 식민 당국을 경악과 충격 속에 빠지게 했다.

생애: 간디주의 ‘아힘사(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

간디는 상인 출신 계급(바이샤)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혼풍습에 따라 13세에 결혼하여, 16세에 아이를 낳았으나 4일 만에 죽었고 그해 아버지도 치루염으로 사망하였다. 훗날 간디는 어린 시절 결혼 생활에 죄책감을 느꼈고 인도의 조혼풍습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18살 때 사말다스 대학을 중퇴하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1891년 변호사 면허를 취득하고 남아프리카 뭄바이엣 변호사로 개업.

1893년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에서 인종차별 반대 투쟁단체를 조직, 지도자로 활동함. 1906년에는 트란스발주에서 '아시아인 등록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렸고, 1915년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로 개업하지만 변호사로서 자질이 부족하여 자립에 실패하였다.

그 후 간디는 1차대전에서 영국이 인도를 독립시켜준다는 약속을 지켜주지 않은 것에 저항하는 사티아그라하운동(비협력운동)을 전개한다. 이를 위해 인도 여러 곳을 두루 순회하였고 수방(手紡:charkha)운동을 장려한다.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는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을 실시한다. 납세거부·취업거부·상품불매 등 비폭력 저항이다.

이듬해에 반영·비협력 운동으로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1929년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는 소금투쟁(단디투쟁)행진을 지휘하다가 구금되기도 한다.

인도국민회의파의 수장으로 인도의 완전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반영운동을 벌인다. 아쉬람이란 곳에서 70명의 동지를 이끌고 출발하여 24일을 걸어서 390km 행진한다. 도착해서는 6만 명으로 불어나서 투옥되지만 부당한 소금세는 철폐된다.

1946년 인도는 분할 독립되었고, 78세의 고령 나이에도 불구하고 싸움이 가장 격화된 벵갈에서 힌두·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8년 반이슬람 극우파인 청년의 흉탄에 맞아 사망.

사상: “폭력으로 얻은 승리는 패배다.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간디는 객관적 관념론자로서 신과 진리를 동일시하고, 도덕적 자기개선을 통한 진리를 추구했다. '불상해'(不傷害), '극기', '금욕' 등이 주장하는 도덕의 원리다.

제국주의자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과 민족자본의 입장에서 농민쟁의·노동쟁의를 지도하고 인도 민족을 대중투쟁으로 결집시켜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이런 무저항운동의 근저에는 톨스토이의 비폭력 사상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인도 수도 뉴델리의 간디 추모공원 기념 석에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일곱 가지 악덕(惡德)(Seven Blunders of the world)>이 새겨져 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사회를 병들게 하는 7가지 악덕을 열거한다.

첫째, 철학 없는 정치. 둘째, 도덕 없는 경제. 셋째, 노동 없는 부(富), 넷째, 인격 없는 지식, 다섯째, 인간성 없는 과학, 여섯째, 윤리 없는 쾌락, 마지막 일곱째, 헌신 없는 종교다.”

평가: 비폭력적 무저항운동

지난 뉴욕타임즈에서 '지난 1000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투쟁을 선정하고, UN은 10월 2일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세계 비폭력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간디의 비폭력 정신은 세 가지 혁명과업을 수행했다. (1) 식민주의에 대한 혁명 (2) 인종주의에 대한 혁명 (3) 폭력에 대한 혁명

에피소드: 인간은 부족한 것을 선택한다.

#1: 자신에게 고개를 절대 숙이지 않는 식민지 출신 젊은 학생을 나쁘게 여기던 피터스 교수는, 어느 날 간디가 대학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피터스 교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피터스 교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이보게, 자네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경우란 없다네” 이에 간디는 말했다. “아~걱정마세요. 교수님 제가 다른 곳으로 날아갈게요.”

#2: 복수심이 오른 피터스 교수는 시험에서 간디에게 질문을 던진다. “길을 걷고 있다가 두 개의 자루를 발견했다. 한자루에는 돈이 가득 들어있고, 다른 자루에는 지혜가 가득 들어있다. 둘 중 하나만 차지할 수 있다면, 자넨 어떤 쪽을 택하겠는가?” 간디는 “그야 당연히 돈 자루죠.”

“ 쯧쯧... 나라면 지혜를 택했을 거네.”
“뭐, 각자 자신이 부족한 것을 택하는 것 아니겠어요?”

#3: 히스테리에 진 교수는 간디의 답안지에 신경질적으로 '멍청이(idiot)'라 적은 후 그에게 돌려준다. 채점지를 받은 간디가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제 시험지에 점수는 안 적혀 있고, 교수님 서명만 있던데요.”

어록 "비폭력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잠재된 폭력성을 표출하는 것이 무능력함을 감추기 위해 비폭력의 가면을 쓰는 것보다 낫다."

"나는 기독교도이자 힌두교도이자 이슬람교도이자 유대인이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새로운 진리가 드러나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리에 대한 일관성이다."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한다면 하나의 심부름꾼으로 머물러 있겠습니다."

"이 고통받는 세계에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 나와 같은 수백만 명이 자신의 평생동안에 이 진리를 증명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 뿐 절대 이 영원한 법칙의 오류는 아니다."

"항상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늘 생각을 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