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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훈민정음을 창제한 성군 세종대왕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훈민정음을 창제한 성군 세종대왕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2.12.16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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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조선조 제4대 임금. 성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이름은 도(祹),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집현전을 궁중에 설치하여 학자를 키우고, 학문을 숭상하며, 정치와 문물제도를 정리하여 행정체제를 확립하였다.

세종대왕은 원명 교체기 혼란 시기에 ‘사대’와 ‘자주’의 실리정책을 추구하며 국방을 튼튼히 했다. 세종 25년 친히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INTRO: 백성을 위한 따뜻한 마음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 세종대왕이다. 한글을 창제하고, 조선의 영토를 넓혔고 과학과 문화를 발전. 그가 가장 존경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백성을 내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신 행보다.

세종 15년(1433) 천체 측각기인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고, 세종 16년(1434)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발명하고, 세종 23년(1441)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수(河川水)를 재는 수표(水標)를 발명하였다. 측우기의 발명은 이탈리아 사람 베네데토 카스텔리보다 거의 200년 앞선 세계 최초의 것이다.

특히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진보된 글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언어만 있을 뿐 문자가 없던 인도네시아의 부퉁섬 ‘찌아찌아족’이 2009년 한글을 공식문자로 받아들인 사례로 증명.

생애 및 평가: 포용 리더십을 발휘하다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충녕 대군이라고 불렀다. 본래 태종의 뒤를 이을 세자는 맏아들인 양녕 대군이었으나 됨됨이를 인정받아 1418년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눈병이 날 정도로 독서와 공부에 열중했고, 그런 습관은 임금이 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모아놓고 “나는 한 번 읽은 책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궁중에 있을 때도 책을 놓고 한가롭게 지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의 성실함과 학문 탐구, 백성에 대한 깊은 애정 덕분에 수많은 업적이 만들어졌다.

세종은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만들어 인재 기르기에 힘썼다. 집현전 학자들은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특히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글을 올린 사람들을 감싸고 세자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포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1446년에 만든 훈민정음은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세종 때에는 인쇄술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어 갑인자 등 새로운 활자와 인쇄기가 만들었고, 과학 기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노비였던 장영실을 등용해 간의나 혼천의 같은 천문 기구는 물론이고 앙부일구나 자격루 등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다.

백성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농사법 개량에 힘썼으며, 발전된 농사법을 전파하기 위해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의약 서적인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나왔다.

또한 세종은 음악에도 관심이 깊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비하고, 편경과 편종을 대량으로 만들게 했다.

국방 분야에서는 화전(火箭), 화포(火砲)를 개량하여 우리나라 무기사상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군사 훈련과 화기의 개발, 병서의 간행 등에 힘을 기울여 이종무에게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를 정벌하게 했다.

김종서를 두만강 유역에 보내 6진 개척과 압록강 유역 4군을 설치해 두만강과 압록강 남쪽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삼았다.

조세제도를 정할 때 온 백성의 민의를 파악했다. 의료기관을 정비하고 향약을 개발. 당시 종교는 유교였지만 선종(禪宗), 교종(敎宗) 등 불교 발달에 노력하여 유교와 불교 내지 도교(道敎)가 조화된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이란 책을 만들어 반포했다. 또 이과(吏科)와 이전(吏典) 시험에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정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에 크게 힘썼으며, 우리 문자 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만 전념한 데다 20대 초반부터 왕위에 올라 열심히 국정을 돌보았고 육식을 즐겨 하고 운동을 하지 않아 비만에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1442년부터 국정에서 물러나고, 좋은 온천에 들러 안질을 치료하거나 요양을 하고 유명 사찰을 찾아 먼저 떠난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켰다.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연달아 세상을 뜨고, 왕비 소헌왕후마저 먼저 세상을 뜨는, 연이은 가족들의 사망 이후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1450년(세종 32년) 향년 52세에 승하하였다.

에피소드: 애민정신과 부국 강경의 꿈을 이루다

#1. 함석헌 선생님은 세종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가 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하였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2.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후덕했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어록: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

“꿈꾸는 태평성대란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撫綬]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백성에게 친근한 관원을 신중히 선택하고 출척[黜陟]하는 법을 거듭 단속하였는데도, 오히려 듣고 보는 바가 미치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된다."- 세종실록 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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