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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노예 해방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노예 해방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2.12.23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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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부적 위기로부터 나라를 이끌어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 미연방을 보존하였고 노예제 폐지.

INTRO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하다”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나라들의 면면을 보면 그 나라를 이끈 위대한 인물이 있다. 지금도 지도자를 잘못 만나 고달픈 삶을 이끌어가는 국민들이 있는가 하면, 훌륭한 지도자로 인해 분에 넘치는 행운을 누리는 국민도 있다.

링컨은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농부의 가정에서 출생. 정규교육은 18개월간 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 22살 때 사업에 실패, 23살 때 주 의회 선거에 낙선, 25살 때 또 사업에 실패.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세번 낙선, 상원의원 선거에도 낙선. 부통령 후보 지명에도 고배. 51살에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

미국 역사가들과 정치평론가들 사이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에 대한 설문조사 때마다 거의 매번 1위에 오르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이력은 가난과 좌절, 실패로 점철돼 있다.

생애: 실패가 없으면 성공도 없다

1809년 토머스 링컨의 둘째 자녀로 태어났으며, 그의 생가는 시골 통나무집이었다. 링컨의 어머니는 독초를 먹은 소에서 짠 우유가 매개체인 우유병으로 34세로 삶을 마감했다.

아내의 죽음으로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며 링컨이 "엄마"라고 불렀던 친구 사라 존스턴과 재혼하였다. 사라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돌보았고, 책을 좋아하는 링컨의 편을 들어준 덕분에 링컨은 풍부한 학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부친 토머스는 배움은 없었지만,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는 훌륭한 이야기꾼으로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링컨은 연설을 배웠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링컨은 23살의 나이로 정계의 문을 두드렸다. 1832년 일리노이 주의회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지만 2년 후 주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주의원을 4차례 연임한 후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846년 하원의원에 당선됐지만 2년 단임에 그치고 고향에서의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전에 뛰어들어 민주당의 거물정치인 스티븐 더글러스와 경쟁을 벌였다.

당시 선거전에서 링컨은 "갈라진 집안은 제대로 설 수가 없다.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州)와 모든 인간의 자유를 신봉하는 주(州)로 갈려 미국 정부가 유지될 수 없다" 면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선거에 패한다.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된 링컨은 1860년 공화당의 후보 지명을 받아 제16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종전까지는 미국의 모든 대통령은 대륙의회에 참가한 13개주 출신들 일색이었으나 켄터키의 변방 태생이 대통령이 된 것은 링컨이 최초였다.

대통령 당선 직후 노예제 폐지에 반발한 남부 주들의 연방 이탈로 분열의 위기 속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링컨은 북부의 여러세력들을 조정하면서 점진적으로 노예해방을 단행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게티즈버그에서 막대한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전세가 한때 위기로 몰리고 북부내에서도 강강. 온건파간의 격렬한 대립 속에 정치적 파국의 위기를 맞았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 묘지에서 행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연설로 단합을 이끌어내고 전세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864년 재선에 성공한 후 이듬해 남북전쟁이 종결되는 상황을 지켜봤으나 남군의 항복 이틀 후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남부 출신의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암살당한 링컨은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으로 분열의 상처가 극심했던 미국에서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을 꼽으라면 단연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꼽는다.

과업: 노예 해방의 아버지

링컨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27세에 변호사가 되었고, 13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된 후에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금의 미합중국을 탄생시켰다.

링컨이 노예 해방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미국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링컨은 오하이오강의 나룻배 사공에서부터 잡화점의 점원, 우체국장, 측량기사 등의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훗날 링컨은 "겨울에도 팔꿈치가 드러난 해진 옷을 입었고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낡은 구두를 신었다"고 궁핍했던 젊은 시절을 술회했다.

숱한 선거에서 패했지만, 선거 유세 중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연설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직접 작성한 연설내용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교통수단이나 미디어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던 19세기 중반, 보잘것없는 경력의 링컨이 전국적인 유명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것은 빈틈없는 논리로 무장한 토론 실력과 청중을 사로잡는 언변이었다.

에피소드: 정적을 국방장관으로 선임한 올곧은 지도자

#1. 오랫동안 링컨의 정적이었던 스탠튼을 국방장관으로 임명. 당연히 링컨 주변의 참모들은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링컨은 당시의 남북전쟁을 해결하고 미국에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를 믿었고, 훗날 링컨을 지키는 동반자가 되었다.

1865년 4월 15일, 링컨은 존 부스로부터 저격당했다. 링컨의 기다란 몸은 침대가 짧아서 대각선으로 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탠튼는 길이 남을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에 세상에서 가장 완전하게 세상을 다스렸던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사람과 나무는 누워있을 때만 진정한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2.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구두를 직접 닦는 검소한 생활. 비서가 송구스러워하며“ 제가 닦겠습니다”라고 하자 “구두 닦는 것이 천한 일이 아니네. 모든 일에는 귀천이 없고, 대통령이 구두 닦는 게 아니라 구두닦기가 대통령이 된 걸세”

어록: 나이가 40을 넘은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노동을 소중히 여기자. 노동의 빛은 아름다운 것이다. 노동은 온갖 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나는 계속 배우면서 나는 갖추어 간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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