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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프랑스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샤를 드골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프랑스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샤를 드골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2.12.30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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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프랑스의 제18대 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서 대독 저항 운동을 지휘했으며, 전후 프랑스 총리와 대통령을 역임했고, 프랑스를 핵보유국으로 만듬. 프랑스 국민들이 그들 가장 존경한다.

INTRO: 위대한 군인, 정치인, 사상가이자 문필가

"파리는 상처받았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파리 해방 후의 연설에서

샤를 드골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40년 2차 대전에서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준장으로 진급해 전쟁을 치렀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에 프랑스가 항복을 선언하자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 정부를 세웠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후 드골은 레지스탕스와 시민의 도움을 받아 파리를 해방시켰고,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 지위로 다시 올려놓았다.

1945년 내각 수반으로 임명됐으나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1당으로 올라서자 정계 은퇴를 선언. 그는 수에즈 전쟁, 알제리 전쟁 등을 치렀고, 의회해산, 헌법개정, 임시정부 수반 자리를 쟁취하며 제5공화국을 수립했다.

드골은 알제리 독립과 아프리카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켰다. 드골은 국가 재정을 생각해서 남긴 유언 “가족장으로 할 것,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참배하지 못하게 할 것, 다만 2차대전의 전쟁터를 누비며 프랑스 해방을 위해 싸웠던 전우들의 참배는 허용할 것, 장지는 사랑하는 딸 장애인인 안느가 잠들어 있는 고향마을 콜롱베의 공동묘지로 해달라, 비석에는 이름과 출생. 사망년도만 새기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묘비에는 "Charles de Gaulle, 1890-1970"만 적혀 있다.

생애: 위대한 프랑스 만세

드골은 프랑스 북부 공업지대의 가톨릭계 고등학교 교사 앙리 드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고등학교 졸업한 드골은 1909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그러나, 자부심이 강한 성격과 큰 키 때문에 동기들에게 '꺽다리 황제', '아스파라거스' 등으로 불리며 놀림 받았다.

군인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패배를 되갚기 위해서였고, 강경 프랑스 민족주의자로 성장했다.

군인에서 정치가로 탈바꿈한 드골은 시간관념에 철저해서 식사 시간이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가족들조차도 원칙과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로 집에서도 침실 밖에서는 계절에 관계없이 정장을 입었으며 식사 시간에는 정치 등의 공적인 이야기를 금지했다.

술은 잘못했지만, 식욕은 왕성한 대식가였다. 독단성으로 일관한 그는 결국 자유의 투사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사임 후 시골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다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목을 가리키며) '여기가 아프다'였다고 한다. 그 말을 한 후 의식을 잃고 몇 분 후에 숨졌다.

드골이 사망하자 영국의 극작가 노엘 카워드 경은 "드골이 하느님과 무슨 대화를 나눌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는 "그야 하느님의 프랑스어 실력에 달렸겠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드골의 고집을 은근히 비꼬는 말이다.

평가: 자부심과 오만의 결정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한 드골은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필리프 페탱 보병 대령의 지휘하의 아라스 제33보병연대에 배치된다.

베르됭 전투에 참가했으나, 부상입고 32개월 동안 독일군의 포로로 잡혀 있었고, 이때 5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종전 직후 육군 원수가 된 페탱의 부관으로 복무했고, 후에는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의 교관을 맡았다. 그러나, 자부심이 강하다 못해 오만하다고도 평가받는 성격 탓에 근무 고과가 나빠 10년 이상을 대위에 머물러 퇴역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기갑사단을 창설하고 지휘하여 큰 공을 세운다. 훗날 NATO 중부유럽군 사령관이 된 킬만스에크 장군은 당시 드골의 공세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벽한 역습."이라 극찬했다.

그러나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1940년 6월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이에 드골은 불복하여 몇몇 동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한 후 망명 정부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당시 드골 특유의 오만한 성격 탓에 같은 연합국 지도자들인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전쟁 내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파리 해방을 이룬다.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이 수십만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개선 행진을 하며 드골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이제 드골은 프랑스 전체를 손에 쥐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프랑스의 통치자로 다른 연합국에게 인정받고 평생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1945년 11월 헌법제정의회에 의해 내각 수반으로 임명된 드골은 대(對)독일 저항운동의 주역이었던 프랑스 공산당(PCF)을 내각에서 제외하고 우파만의 정부를 세웠으나,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제1당으로 올라서면서 그해 말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회고록 집필 등으로 소일하며 칩거하던 드골은 1958년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다.

당시 프랑스 제4공화국은 수에즈 전쟁에서의 패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패배, 알제리 전쟁의 장기화로 위기에 직면하는 등 인도차이나 전쟁의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프랑스 식민지의 독립요구로 인해 경제는 엉망진창이었다.

궁지에 몰린 제4공화국은 헌법 개정안을 상정해 1958년 9월에 국민투표 76% 찬성으로 드골 대통령이 되었다.

에피소드: 드골 묘지엔 묘비명이 없다

#1. 아끼던 후배 장교가 병으로 일찍 죽었을 때 슬퍼하면서 6개월간 상복을 입고 다녔다. 

#2. 성격은 완고했지만, 가족들에게 애정이 많았고, 사생활도 깨끗했다. 특히 다운 증후군 환자로 태어난 둘째 딸을 평생 아끼고 사랑했으며 딸이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주변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애썼다. 

막내 딸은 20살의 나이에 사망했고, 그로부터 10년 후에 드골은 대통령으로 당선. 샤를 드골은 딸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해 선천적 장애아이들을 도왔으며, 죽기 전 ‘안느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어록:“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만, 프랑스는 전쟁에서 지진 않았다”

“내 생각에,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_ 전쟁 비망록 

“내가 곧 프랑스다.” - 1940년 영국의 외무 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앞으로 우리 프랑스가 외세의 지배를 또다시 받게 될지언정 민족을 배반하는 인간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_ 나치 부역자들을 처벌한 후 연설에서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한 2022년은 감사와 잊지 못할 귀한 해였습니다.

새해 계묘년, 검은 토끼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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