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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칸트,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을 가르친 스승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칸트,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을 가르친 스승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10.06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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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INTRO: 비판철학을 통해 서양 철학을 종합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프로이센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존 로크의 경험주의를 종합.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 서양 철학의 전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칸트가 남긴 저작 중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 유명하다.

생애: 근현대 철학의 중심 인물, 현대 윤리학에 큰 영향을 미치다

칸트는 마구(馬具) 장인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그 칸트와 독실한 경건주의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의 열 한 자녀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칸트의 할아버지 때 스코틀랜드에서 동(東)프러시아로 이주했다. 칸트는 ‘엠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나중에 히브리어를 배운 뒤 스스로 ‘임마누엘’로 바꾸었다.

칸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경건주의 기독교가 득세한 곳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였다. 칸트는‘경건주의자들의 합숙소’라는 별칭이 붙은 콜레기움 프리데리치아눔에 입학하여 라틴어를 비롯한 교양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13살 때 칸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6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6년간 공부. 집안이 부유하지 못해 생계를 위한 가정교사, 사강사, 왕립 도서관 사서로서 지냈다.

1755년 31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논문 <보편적 자연사와 천체이론>을 발표했다. 1756년 공석이 된 논리학, 형이상학 원외 교수직에 응모했지만 임용받지 못했다. 그리고 1770년 46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논리학, 형이상학 강좌 담당 정식 교수로 임용됐다.

1781년 57살 때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지만 ‘해괴망측한 나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고 내용에 대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칸트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순수이성비판> 입문서에 해당하는 <형이상학 서설>(1783)을 내놓았다.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0년 <판단력 비판>을 내놓음으로써 칸트의 이른바 삼대 비판철학서가 완결되었다.

칸트는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관리로 강의, 연구, 저술 활동을 별 어려움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그가 하루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산책에 나섰다.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의 시각을 맞췄다는 얘기, 그런데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느라 단 한 번 산책 시간을 어겼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1799년부터 크게 쇠약해진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늙은 하인 람페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좋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뒤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날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갔고 운구 행렬에 수천 명이 뒤따랐으며 시내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弔鐘)을 울렸다. 철학자 칼 포퍼는 이에 관해 <추측과 반박>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804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절대왕정 치하에서 칸트의 죽음을 애도한 그 많은 교회의 종소리는 미국 혁명(1776)과 프랑스 혁명(1789)의 이념이 남긴 메아리였다. 칸트는 고향 사람들에게 그 이념의 화신이었다. 인간의 권리와 법 앞의 평등, 세계 시민권과 지상의 평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을 가르친 스승에게 고향 사람들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몰려왔다.”

사상: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비판철학자

칸트의 핵심사상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그리고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이다. 비판은 깊게 파고든다는 의미이다. “순수이성”은 우리 모두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칸트는 경험론이 아닌 합리론에 의해 상대적 진리가 아닌 절대적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은 인간 개개인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순수이성에 의해 선을 판단하고 그 선을 실천하기 위해 “실천이성”이 존재한다.

또한 실천이성에 이르기 위한 명령을 “정언명령”이라고 주장했다. 즉 정언명령은 아무런 목적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내면의 순수 이성에 의해 선하다고 판단한 보편적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가언명령은 보편적 진리를 넘어서 행위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대가로 윤리자체가 목적이 아닌 그 외의 목적을 지닌 채로 바라고 실천하는 행위이다.

칸트에게 있어 인간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가언명령에 따른 행위이고,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대할 때 비로소 정언명령에 따른 선한 행동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한 “인간을 항상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주장한다.

칸트의 사상 체계는 흔히 크게 세 갈래로 나눈다.
인식론: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윤리학: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종교철학: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근대 서양 철학의 합리론은 인간의 이성이 태어날 때부터 지식을 갖고 있기에 경험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경험론도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는 것으로 합리론을 배척한다.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 모두를 비판하고 종합한 철학자다.

인식의 형식은 본래부터 갖고 있지만, 인식의 내용은 경험으로 얻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인간은 경험을 재료로 삼되, 경험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인식 능력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알 수 있다. 인간은 인식에서나 행위에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능동적 존재이어야 한다.

인식의 능력이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성의 능동적인 작용에 바탕을 둔 범주다. 시간과 공간은 경험을 통해 인식 대상을 담는 틀이고, 범주는 개념을 통해 지성이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이다.

직관은 수동적, 수용적이고 개념은 능동적, 자발적, 구성적이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말에서 그의 사고 배경을 알 수 있다.

명언: 유물론과 무신론을 상대한 전투에서 승리하다. 

1. 재물은 생활을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2. 청년들이여,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을 차라리 거절하라. 
3. 여자는 참을성이 있어야만 하며, 남자는 너그러워야만 한다.
4. 오직 거룩하고 깨끗하게 생활하는 사람만이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 
5. 자기와 남의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6. 과학은 체계화된 지식이고, 지혜는 정리된 인생이다.
7. 나는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다.
8. 자유는 스스로 자신을 자유의 몸으로 이끌어 나아갈 만한 사람에게 깃든다.
9. 인간은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다.
10.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에피소드: 비판철학을 통해 서양 근대철학을 종합한 철학자

#1.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자신의 고향 쾨니스베르크에서 150킬로미터 이상을 벗어난 적 없이 생활했다. 칸트는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2. 칸트는 정언명령과 시계맨으로 유명하다. 정언명령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옳다고 정의한 것에 대해 혹은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것에 있어서 착실하게 수행한다. 그는 늘 같은 시간에 산책하고 강박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다. 마을 사람들은 시계로 활용할 정도였다.
#3. 칼리닌그라드에 있는 칸트 묘석, <실천이성비판>의 유명한 구절이 써 있다.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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