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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최초의 독일 제국 건설한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최초의 독일 제국 건설한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10.13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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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독일을 최초로 통일한 정치가, 1862년 빌헬름 1세 때 수상이 된 그는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오늘날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와 의해 결정된다'는 철혈정책의 헌법 투쟁을 하였다.

보수 정치인으로서 건강보험을 비롯해 수많은 복지정책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INTRO: 강력한 부국강병책으로 독일 통일을 이루다.

<철혈정책>에 따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비를 확장. 프로이센·오스트리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철혈 재상'이란 명칭을 가졌다. 1871년에 독일 통일을 완성한 프로이센의 정치인.

일생: 전쟁을 외교의 강압적 수단으로만 사용

비스마르크(1815년~1898년)는 프로이센 쇤하우젠에서 융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예비역 장교로 별 볼 일 없는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사교적이었지만 가정에 무심했다. 어린 나이의 자녀들을 기숙사 달린 학교로 보내 명절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오토는 어린 시절 학업에 별다른 재능이나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언어능력만큼은 탁월했고 고전에 심취하였다.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구사하여, 훗날 외교관으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대학 시절, 술, 총, 주먹, 도박을 즐긴 다혈질.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847년 프로이센 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 반(反)혁명파로 활동한다.

러시아 프랑스 주재 대사를 거치면서 국제적 외교 감각을 지녔다. 그 후 1871년-1890년까지 독일제국의 수상으로서의 유럽 외교무대를 주도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활용했다. 

1872년부터 남부독일의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한 문화투쟁도 벌였다. 사회주의를 억압하면서 수상 취임 후 첫 연설은 군비 확장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과 식민지 획득을 장려하여 아프리카에 독일 식민지를 획득하는 데 공헌도 하였다.

대외적으로 철혈재상의 강인하고 냉혹한 이미지를 갖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했다. 신경쇠약과 과식으로 고통받았고, 사망원인도 과식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눈물도 많았다. 

아들의 결혼에 반대하는 과정에 울면서 자살하겠다고 말렸다. 보오전쟁의 보상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 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임하겠습니다!'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 비스마르크가 더 필요하니 내가 퇴위하겠다!'고 맞받아쳤다.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1898년 7월 30일 사망, 시신은 그의 희망에 따라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묻혔다.

평가: 냉철한 현실주의자

비스마르크 평판은 독일의 정치문화에서 이룬 중요성과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했던 정치가로 독일을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백 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탄생시켰다.

특히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 정책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비스마르크가 만들어 낸 복지제도는 독일이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들었고,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독일 연방 의회 외교관으로 활약하면서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맞서서 북독일의 프로이센 위주의 복수주도권을 주장했다.

그 당시 주목할 만한 일화로 소위 '위신 투쟁' 사건이 있었다. 당시 연방 회의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던 오스트리아 제국 대표만이 회의 석상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가?'라며 의장에게 직접 불을 청해 담배를 피웠다. 돌발적인 행동으로 각국 대표들은 '조국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희생'을 하였고, 프로이센이 더는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대러 친선을 유지하였다. 프로이센 수상에 취임하자마자 징병제 기간 연장과 군대를 증강시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했다.

취임사에서 밝힌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무기)과 피(=전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명언: 세금을 내라, 군대에 가라, 닥쳐라

"비록 군비가 우리의 빈약한 몸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몸에 지니는 정열을 지녀야 할 것이며, 또한 감히 그와 같이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다. 지금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모든 군인과 정치가들은 전쟁을 가볍게 여겨서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고 있을 뿐이다” "음악이란 사랑처럼 무상으로 주어져야 한다.“

“우리 독일인은 신을 두려워할 뿐,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겸손은 훌륭한 미덕이지만 정치가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일할 때는 절제와 도덕성이 중요하며 특히 먹는 것과 술을 멀리해야 한다."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보지 않는 것이 좋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 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난다.”

에피소드: 독일의 통일은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닌 오직 철과 피로써.

#1. 독일 제국 성립 전에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나갔길래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문관 출신임을 비꼰 것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2. 젊은 시절 친구와 늪지대를 통과하다가 친구가 늪에 빠졌는데 총대를 내밀었지만 닿지 않자 총을 장전해서 친구에게 겨누고 "자네를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 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없이 죽여주겠네."라고 말해서 친구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왔다.

#3. 비스마르크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단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 그러나 정작 본인의 청년시절 생활은 성실하지 않았다.

#4. 비스마르크 원수 시절, 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병사 한 명에게 훈장을 수여하면서 농담을 했다.

"내가 자네라면 이 훈장을 집어치우고 돈으로 100마르크를 받길 원하겠네."
그러자 병사가 질문했다. "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 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이거, 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마르크 밖에 안 될 걸세." 그러자 그 병사가 말하길, "그럼 저는 그 훈장과 99 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 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껄껄 웃으면서 그의 말대로 해주었다.

#5. 영어에 능통하였기에 이홍장(청나라 정치인)과 만났을 때에 통역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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