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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음악의 어머니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음악의 어머니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10.27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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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INTRO: 바로크 음악의 양대 산맥

헨델은 바로크 후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같은 독일 출신의 동갑내기 작곡가인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진다. 그래서 헨델의 별명도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와 대비되어 '음악의 어머니'로 불린다.

바흐가 주로 기악곡과 종교음악 쪽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면 헨델은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와 같은 극음악 쪽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초연 후 지금까지 유럽 문화권에서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던 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독일 출신이지만 영국에 귀화해 활동한 독일계 영국인. 독일에서 활동한 기간보다 영국에서 활동한 기간이 두 배 정도 더 길다.

생애: 영국에 귀화해 활동한 독일계 영국인 

헨델(1685~1759)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마그데부르크 공국 산하 할레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이발사 겸 궁정외과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음악에 관심과 두각을 나타냈다. 헨델의 어머니는 후처로 헨델을 낳았을 때 아버지가 자그마치 63살이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버지의 고용주이자, 작센 바이센펠스 공국의 공작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빌헬름 차호의 문하에 들어갔다.

11세 때에는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을 익혔다. 헨델의 아버지는 음악을 단순한 위안거리나 오락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음악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헨델에게 '법관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고 할레 대학의 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자신의 적성에 따라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들어가며 음악가의 인생을 시작한다.

헨델의 말년은 불운의 연속으로 1750년 독일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네덜란드에서 마차사고로 큰부상을 입는다. 설상가상으로 1751년에는 백내장으로 한쪽 눈의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고 실명했다.

하지만 실명 후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고, 향년 74세. 사망 후에는 영국에서도 본좌들만 안장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헨델은 지금까지 살았던 작곡가 중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다. 나는 모자를 벗고 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업적: 천재적인 오르간 연주 솜씨와 탁월한 작곡 능력

이탈리아 풍의 오페라를 영국식 오라토리오로 만들어 그 최고의 지위에 올려 다음세대의 하이든과 멘델스존 같은 후진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통상 3대 오라토리오를 꼽자면 바로크기 헨델의 <메시아>, 고전기 하이든의 <천지창조>, 낭만기 멘델스존의 <엘리아>를 든다.

헨델은 음악말고도 경영에도 수완을 보였는데 <거지 오페라>를 감독했던 왕년의 적수 존 리치와 합작으로 오라토리오 전용 극장을 만들어 운영했으며, 중간 휴식 시간에 오르간 즉흥연주를 끼워 넣어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배려하는 등 참신한 공연을 했다. 또한 한 번 공연에 표 한 장을 파는 '콘서트 방식'을 최초로 도입했다.

그는 동갑내기 바흐와는 달리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음악을 많이 썼으며 음악이 웅장하고 이해하기 쉽다. 1713년, 헨델은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앤 여왕을 위해 <앤 여왕의 탄생일을 위한 송가(HWV 74)> 등의 작품을 작곡하였고, 앤 여왕은 그에게 연금을 하사했다.

영국 생활에서 샨도스 공작 밑에서 일했는데, 웅장한 송가 몇 편과 오페라들을 썼다. 런던에서 오페라 세리아 유행이 일으켜 영국의 귀족들이 주축이 된 오페라 악단을 창립한다.

헨델은 타고난 체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일평생 음악에 매진했으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세 번이나 왕립음악아카데미를 창립했을 정도로 초인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의 오페라는 일종의 공장 양산형으로 빠르게 작곡되었고 저작권도 없는 상황으로 표절이 많았었다. 작곡가나 대본작가들은 자기 작품에 대한 역량과 소신이 아니라 가수나 극장주, 높은 분들, 관객들의 요구에 따라 제멋대로 변경되기 일쑤였다. 헨델 당시 62회 공연 횟수는 유럽을 전역을 통틀어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뛰어났던 음악가, 그의 음악은 단순한 소리를 뛰어넘은 감성의 언어였고, 인간의 수많은 열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힘마저도 모두 초월한 것이었다. ”-헨델의 비문

명언: 영감과 창의성을 획득하다.

“오 그분이 강림하신 것 같았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기 위해
음악을 만든다.”

에피소드: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1. 헨델은 물욕과 출세욕만 넘치는 인간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헨델은 병원을 위해 메시아를 연주해 주고,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금전적인 기부도 하는 등, 여러 자선활동을 펼쳤다. 영국 대중으로부터 많이 사랑받았고, 실제로 그의 장례식에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추모를 왔다.

#2. 불후의 명곡 '메시아'가 태어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헨델은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자라났지만, 그의 삶은 즐거움과 물질의 부요함을 추구했다. 그의 작품이 연주되는 오페라에는 관객들이 모이지 않았고 얼마 후 그 자신도 뇌일혈로 쓰러져 거동할 수 없는 불편한 몸이 되었다. 

빚은 점차 늘어가고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도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헤매던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그 친구의 편지에는 한 편의 시와 '자신이 보내는 시를 작곡해 보라'는 간단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친구의 시는 성경의 이사야서(40:1)의 말씀으로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주의 영광은 드러나고야 말리라. 모든 육체가 그 영광을 보리라." 헨델은 친구의 시가 큰 위로가 되어 음악적인 영감이 밀려왔다. 금식을 하면서 잠도 거의 자지 않은 채, 단 24일 동안 신들린 듯 <메시아> 전곡 53권을 작곡해 냈다. 

#3. 에너지가 넘치고 다혈질의 소유자였으며 급하고 과격한 성격 때문에 자주 (주먹) 싸움을 벌였고 심지어 결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4. 헨델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숨겼고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식욕만큼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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