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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신에 의한, 신을 향한 유토피아, 고백론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신에 의한, 신을 향한 유토피아, 고백론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11.17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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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 이성보다 신앙을 우위에 두고, 철학과 신학이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제시했다.

<고백론>은 신에 대한 기도문 형식으로 기록된 자서전적 저서로서, 신께서 어떻게 고통스러운 순례의 길을 통해 자신을 신앙으로 이끌었는지를 자세히 묘사한다.

INTRO: 초대 기독교 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4 ~ 430)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 교부철학과 신(新)플라톤학파의 철학을 종합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의에 이론적인 기초를 다졌다. 중세의 기독교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도 가톨릭과 개신교에 현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회의론을 반박하였는데, 이 확실성은 후에 데카르트가 '나'의 확실성에서 자기 학설을 세웠던 발상과는 달리, 영원한 진리, 즉 이데아로서 영혼의 내면에 스며든 신의 빛(라틴어 illuminatio)에 의한 자기 존재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다.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주요 저서인《고백록》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생애: 방탕한 생활에서 신앙을 이성보다 앞세우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방탕하게 생활하며 18세에 유부녀와 동거하며 아이까지 둔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어머니를 통해 신의 섭리를 배우고 익혔다. 법률공부를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하였는데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지만 방탕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 생활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니교에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승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영적 세계와 우월성을 강조하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전수받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32세 되던 386년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신학과 철학에 정진하며 수도원을 세운다.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된다. 죽기까지 500여 권의 저술과 200여 통의 편지를 남겼다. 그의 저서로 《고백록》《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사상: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를 만들다.

그는 세계가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은 악을 행하는 자유를 가질 뿐이며,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고, 이 구원의 대상이 누가 되는가는 신의 영원한 예정에 의한 것이며(예정설) 교회가 이 은총을 매개한다고 주장하였다.

출처=블로그 ‘책에 빠지고, 영화를 읽다’ 캡처
출처=블로그 ‘책에 빠지고, 영화를 읽다’ 캡처

<신국론>에서 국가는 시민의 것이며, 시민의 안녕과 복지야말로 공화국의 본령이라고 말한다. 공화국은 사랑에 대한 합의에 의해 구성된 이성적인 존재들의 사회로서, 법에 관한 공통된 인식과 이해관계에 의해 연합된 결사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공화국에서 법은 반드시 정의와 평화를 전제한다.

'교회 외에 구원은 없다'라는 그의 신앙과 사상을 역사철학의 형태로 전개한 것이 만년의 저작인 『신국론』(神國論, 413~426)인데, 그는 여기에서 인간의 존재를 지상적인 측면과 천상적인 측면 양쪽에서 파악하고, 역사를 인간에 대한 신의 구원 계획의 실현과정으로 보면서, 교회라는 보편적인 인간공동체의 확립을 통하여 영원한 기독교 공화국인 '신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실현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시대인 노예제의 붕괴와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몰락하고 있던 로마 제국에 있어 이교도가 횡행하는 황폐한 현실이 '땅의 나라'였던 것이다.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명언: 인내와 지혜는 땔 수 없다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고백론
“믿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에피소드: 세계의 신의 사유의 반영물이며 세계를 이루는 형상의 전형이다

#1. 유물론, 쾌락주의,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했다. 회심의 결정적인 계기는 하나의 사건에서 출발한다. 정욕에 빠진 그가 신에게 “신이여! 왜 지금 저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지 않는 것입니까?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외치며 깊은 상심에 빠져 있을 때 이웃집에서 “잡아! 읽어! 읽어!”라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목소리에 이끌려 성경을 일기 시작했고 눈에 띈 첫 구절은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려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13~14)’였다고 한다. 그는 이말씀을 신이 주신 표적이라고 여기고 타락한 생활에서 탈피하여 금욕적인 수도사의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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