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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카롤루스 대제, 서유럽의 지배자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카롤루스 대제, 서유럽의 지배자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12.01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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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2대 왕이자 서로마 제국의 계승국임을 서방 세계에서 인정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영토 확장과 반란 진압에 몰두하여 실질적인 제국을 이루었다.

INTRO: 유럽의 아버지, 신성로마제국의 시초

카롤루스는 프랑스, 독일에서 카롤링거 왕조를 창업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한 최초의 인물이자 로마제국 이후 처음으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시켰다.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세운 나라로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는 국가이다. 후대 여러 유럽 왕위에 영향을 끼친 살리카법이라는 법전을 편찬하였다.

생애: 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대통일 사업 성취하다

카롤루스 대제(742~814)는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2대 왕이자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은 황제이기도 하다.

768년 부친인 피핀이 죽은 뒤 동생 칼만과 왕국을 공동 통치하다가 771년 칼만이 죽자 프랑크 왕국을 통일 지배하였다. 40여 년에 걸친 재위기간 동안 사방을 점령하여 대통일 사업을 성취하였다.

772년부터 804년 사이에는 작센을 병합하고, 774년에는 교황의 청으로 북이탈리아 랑고바르트 왕국을 멸망시켜 이를 합병하였다. 778년 서쪽으로는 사라센족을 토벌하여 에스파냐 변경 영토를 설치하였다.

게르만족을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종교, 즉 프랑크 왕국과 그리스도교로 통합하였다. 그밖에 이탈리아의 영토 일부를 교황에 헌납하는 등 교회에 대한 봉사가 컸으므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800년 크리스마스 때 서로마 황제에 올랐다.

이로써 다시 부활된 황제권과 교황권의 제휴로 피핀, 클로비스 이래의 과제였던 유럽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실현되었다. 또한 수도 아아헨에 궁정 학교를 설립하고, 알퀴누스를 비롯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육 사업을 장려하여 카롤링 르네상스 문화를 번영시켰다.

유럽을 형성하는 3대 문화 요소인 고전 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 정신의 완전한 통합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아헨으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병석에 누웠고, 814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아헨 대성당 지하에 매장되었고, 그의 능은 성역화되어 카롤루스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업적: 카롤링거 르네상스, 유럽의 아버지

프랑크 왕국을 동로마 제국과 비등한 하나의 제국으로 키워내서, 서부 유럽을 규합한 유능한 군주이다.

당대 프랑크 제국은 문화나 경제력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인구나 군사력에 있어서는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군사적 확장으로 폐허나 다름없던 서방의 지적 풍토에  문화적 부흥을 일으켰다.

역사학자들은 카롤루스의 통치기를 카롤루스 르네상스라고도 불렀다. 당시의 문학, 예술 등을 발전시켰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독해가 가능한 학자들을 양성하고 각지의 수도원에서는 로마와 그리스 고전들의 필사본을 대량으로 제작하게 하였다.

이 시기 개혁된 카롤루스 문자에서 현존하는 알파벳 소문자가 유래되었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은 카롤루스가 800년 황제로 추대되면서 일어났다.

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아무리 제국이 어려운 상황이라도 글자를 몰라서 열십자를 긋는 걸 서명으로 대신하는 야만족을 황제로 받아들인다는 건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고, 807년 임시 휴전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 왕조 치하에서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은 일시적으로 경제적인 부흥을 누렸다. 이는 카롤루스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7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프랑크 왕국의 인구는 추정 750만에서 추정 900만까지 증가하였으며, 라인강 하류의 저지대에서 프로방스 및 베네치아까지 라인강을 중심으로 여타 강들과 연계된 프랑크 왕국 중부지역의 상업망은 고대~중세 초기까지의 주요 경제지역이었던 지중해와 북해를 잇는 경제권을 형성했다.

카롤루스는 화폐도 개혁하였다. 이 당시 이슬람 세력이 남부 지중해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이 귀해졌기에 자체적인 금화 통용은 어려워져 이전까지 쓰이던 트리엔스 금화는 발행이 중지되었고, 그 대신 은을 단일 기축통화로 했다. 이로써 솔리두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경제권에서 벗어난 새로운 화폐망을 구축하였다.

카롤루스는 군사적 필요에 의해 친 유력자적인 경제정책을 폈고, 이들 유력자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농노들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전시에 이들은 중무장한 기병대가 되어 정복 전쟁에 참전하였다. 카롤루스의 치세는 봉건제도의 시작을 알렸다.

명언: 기사 전설의 주인공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은 두 번째 영혼을 갖는 것이다"
“질문할 줄 아는 것조차도 이미 학문이다"
"이 전쟁은 우리 모두의 의지와 능력에 대한 시험이요, 고난이다. 프랑크 왕국의 병사들이여! 용감무쌍했던 우리 선조들처럼 다시금 힘을 내 진군하자!“

에피소드: 문맹이었음에도 장신의 쾌활한 성격

#1. 카롤루스 대제의 전기작가인 아인하르트가 저술한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카롤루스는 "눈이 크고 눈빛은 활기를 띠고 있다. 코는 약간 길고, 머리는 금발이며, 표정은 쾌활하게 웃는 듯하다"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목소리가 가늘고 높은 편이었다고 전하며, 말을 급하게 할 때에는 더듬거리기도 했다고. 대식가이며, 구운 요리를 특히 좋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균형이 잘 잡힌 전사형이었다.

그는 중년에 약간 배가 나왔던 것을 빼면 평생동안 젊은 시절의 몸매를 유지했다고 한다. 키가 매우 컸다고 전해지는데, 19세기 중반에 그의 관을 열고 신장을 재 본 결과 192cm의 장신으로 확인되었다. 사치스런 옷보다는 모피 상의에 푸른 망토를 걸치기를 좋아했지만 무기만은 고급 무기를 고집했다.

#2. 카롤루스가 글을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실제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침대 베개 밑에 서판을 놔두고 자기 전에 꼬박꼬박 연습을 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서명은 공문서에 2개의 줄을 열십자로 긋는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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