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7:30 (토)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12.15 11: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진혁 작가]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화가. <피에타>, <다비드> 등의 조각 작품을 통해 사람 몸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했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을 그린 르네상스를 대표한 이탈리아 예술가.

INTRO: 예술의 영원함을 증명한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복원한 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신학의 거룩한 성소"라고 말할 정도로 거룩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화와 벽화를 통해 세월 앞에 인간의 목숨은 부질없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을 증명한 것이다.

생애: 조각 작업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

미켈란젤로(1475~1564)는 이탈리아 카프레세 출생. 아버지는 읍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어느 석공의 아내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영민한 아들에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공부'를 하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만을 했다.

집안에서 예술가가 태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를 때려가면서 아들을 훈육했지만, 미켈란젤로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13세 때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서 도제 수업을 받는다.

천재는 일찍 발견되는 지, 스승도 그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다. 일 년 정도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그림에 싫증을 내고,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 조각을 원해,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성당 정원에서 가르치던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예술가들의 후원으로도 유명한 메디치가의 로렌초 공은 미켈란젤로를 눈여겨보았고, 그의 배려로 피렌체의 뛰어난 학자와 미술 수집품을 보고 읽어내면서 성장했다.

로맹 롤랑 "천재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고 말할 정도로 미켈란젤로의 힘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작가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를 느끼게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피에타> 조작 작품들과 바티칸 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주장하면서도 화가가 되어 붓을 들고 고개를 위로 쳐들고 천장에다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을 올려다보면서, 이 천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폭풍우와 같은 인생을 마쳤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출처=픽사베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출처=픽사베이

업적: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자

현대의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미켈란젤로가 하는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라면서 "약간의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면 일에 파묻혀 잠도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볼로냐에서 율리우스 2세의 동상을 만들 때, 그와 세 사람의 조수를 위하여 마련된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이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장화를 신은 채 잤기 때문에 한 때 다리가 부어 장화를 칼로 찢어야만 했다. 무리하게 장화를 빼면 다리의 살점까지 함께 묻어나올 지경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젊은 시절에 만든 걸작 <다윗> <피에타> 등의 조각 작업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연에서 얻어온 대리석 덩어리를 응시하고 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위대한 형태를 보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돌을 조금씩 뜯어냈다.

미켈란젤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황의 지시를 받아 작업했다. 그중에서도 율리우스 2세와의 관계는 미묘했다. 두 사람은 마치 형제처럼 다정했다가 불화가 반복되는 그런 관계였다. 

천재에게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질투하는 예술가들의 이간질로 교황과 사이가 틀어져 바티칸 궁을 떠났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율리우스 2세는 청동의 주조법을 모른다는 미켈란젤로에게 청동 동상을 주문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다시 한다.' 라는 심경으로 청동 주조법을 배워 동상을 제작하다 실패를 하기도 한다.

어느 날, 율리우스 2세는 당시 벽화의 기법을 전혀 모르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한다. 아니 명령한다.

미켈란젤로의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은 이 천재를 질투하던 브라만테가 교황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교황에게 미켈란젤로를 추천한 것으로 본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고, 이 작업으로 위대한 그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같은 해에 역시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의 벽화를 그려서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 주문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일종의 시험이자 시련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를 추천하면서 자신은 빠져나오려고 했다. 미켈란젤로만큼 외고집이었던 교황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 1508년 5월 10일 이 역사적인 작업은 시작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가 천재의 90년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고 '숭고한 세월'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시절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벌써 일 년이나 교황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너무나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를 받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이 늦어지는 것은 이 일이 어렵고 내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만 자꾸 헛되이 지나갑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그림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그에게 가정적인 문제도 어려웠다. 자꾸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와 동생들과의 문제에서부터 경제적인 결핍, 건강 문제 등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은 절망감에 시달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죽자 마무리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겼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마무리를 잘해 오늘날까지 예술의 천재로 불린다.

에피소드: 죽기 직전까지 성당설계 하다

#1. 미켈란젤로는 72세 때 쓴 시에서 “이제 나의 백발과 나의 고령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미 내 손안에는 저승행 티켓이 들려 있다”고 했다.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 말년을 보내는 것이 꿈이었지만, 대성당 건축이 더 중요해서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조카에게 보낸 편지에 “하느님께서 나를 여기에 두신 것”이라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실패하지 않을 것이고 나 자신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2.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마치 굶주린 자의 맛있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웃음 지을 때, 길에서 인사를 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면
나는 얼굴을 붉히지만
모든 괴로움은 일시에 가라앉지요. _ 미켈란젤로의 시

#3. 그의 조각이나 그림에는 비장한 사상이 들어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쓰고 또 썼다. 1486년부터 1563년까지 500여 편의 편지를 써서 조각이나 그림으로는 담아내지 못했던 마음까지도 담았다.

#4. 미켈란젤로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있었다. 만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하인의 등에 업혀 오기를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병치레하면서도 '식사할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했다. 이런 고통의 삶 속에서도 그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초인적인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예술가의 울타리인 고독에 머물며 오직 작품으로 삶을 승부를 본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