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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4.03.08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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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키에르케고르의 최대관심사는 육체의 생사를 초월하는 가치와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조로 삼아 생활하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죽음은 그리스도교적인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뜻하며 절망을 일컫는다.

INTRO: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적 연관을 밝힌 실존주의적 인간론

덴마크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등과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불안의 개념> <기독교 입문> 등 저서가 있다.

그는 출간하는 데 유산을 다 써버렸으며, 아무런 직업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길에서 졸도하여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마흔두 살이었다.

생애: 주체적 자기 발견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7형제의 막내로 코펜하겐에서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크리스트 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여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증(辨證)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크리스트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 시절에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1827년에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18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반복 (1843)> <불안의 개념 (1844)> <인생 행로의 여러 단계 (1845)> 등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 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로 쓰면서 기성 크리스트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다. 그런 와중인 18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 달 병원에서 죽었다.

사상: 육체의 생사를 초월하는 가치

인간이 절망하는 이유는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절망에 빠지는 이유는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에 빠질 때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기에 절망이 기회가 된다. 절망은 우리가 진정한 자기인 실존을 아는 데 도움을 준다.

키르케고르는 이론보다는 삶을 중시했다.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주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이 주장한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 반기를 든다. 진리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일회적이고 내면적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중요하다.

‘나’야말로 모든 빛이 모여들고, 또 모든 빛이 퍼져나가는 중심이다.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숨 쉬고 있는 시간이며, 머릿속 개념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것, 즉 단독자다.

즉 키르케고르에게 ‘나’는 모든 것이다. 모두 아는 진리라도,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는‘나’의 고유한 결단에 달려있다. 동물에게는 불안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을 배워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인간의 처참한 운명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그 병은 영원히 구원될 수 없는 정신의 병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발전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는 스스로 그 실존의 의의를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직접적인 생존의 단계인, 미적 실존이다. 여기에서는 그저 “인생은 즐겨야 한다”를 모토로 삼는다.

둘째는 인간이 자기 실존의 의의를 잘 알고 윤리적인 사명에 충실하려고 하는 윤리적 실존이다. 여기에서는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이미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셋째는 그러한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고 종교적 실존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겨낸 사람만이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실존이다.

키르케고르는 당시의 세속화된 기독교를 비판했다. 세속적인 국가와 타락한 기독교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

명언: 절망은 자기 자신의 병

“절망은 자기 자신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를 보인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형태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결혼하라, 너는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너는 후회할 것이다.”

“불안은 미리 앞질러 간다. 불안은 결과가 생기기 전에, 그 결과를 먼저 발견한다. 우리가 어떤 날씨가 다가오는 것을 저절로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에피소드: 비극적인 삶에서 종교적 삶으로

#1. 프리드리히 니체는 키르케고르의 저작을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느 덴마크인 독자로부터 "우리나라에 키르케고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쓴 책을 보면 당신이 쓴 책에서 나오는 말과 여러 부분이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둘이 만나기 전에 키르케고르는 이탈리아 여행 중 정신병이 발병하면서 정신적 조우는 불발되었다.

#2. 키르케고르의 세 가지 삶의 단계 중 첫 번째 단계는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미적 단계이다. 그런데 쾌락에는 '쾌락의 패러독스'가 있다. 자기가 원하는 쾌락으로 만족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윤리적 단계이다. 윤리적으로 살면 마음이 편안하고 참된 기쁨과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윤리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윤리적 감수성'이 생긴다. 윤리적 감수성이란 내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민감하게 생각하는 태도이다. 윤리적 감수성이 민감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윤리적으로 살지 못하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종교적 단계이다. 하나님 앞에서 실존자(단독자)로 진실한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3. 그는 평생 세상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했다. 심지어 후세에 그의 이름이 남용되는 것에 대비해서, “나의 유산을 물려받을 사람은 틀림없이 나에게 혐오감을 준 대학의 강사나 교수다. 그들은 나의 이러한 글까지도 강의의 소재로 삼을 것이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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