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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두산 그룹 박용오 회장의 죽음
전 두산 그룹 박용오 회장의 죽음
  • 정 상 편집위원
  • 승인 2009.11.05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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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인간은 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고대한다. 이처럼 인간이 자유를 늘 갈구하는 데에는 분명 그 만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태어남으로써 곧 ‘생로병사’라는 생명현상의 굴레에 갇히는 억압적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아마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나 그 이전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활약하던 많은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이미 설파한 ‘탄생의 비극’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니체가 염원했던 ‘초인’은 지금까지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니이체 역시 꿈을 꾼 셈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자로서의 인간, 즉 초인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영원히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니이체가 추구한 비극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비극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종래 비극으로, 그 비극이 다시 희극으로 승화되는 한에 있어서도 결론은 한 가지 점에 귀착되고 만다. 인간은 결코 주어진 형식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로부터의 탈출, 그것은 인간에게 영원한 숙제이자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언제나 스스로 욕구로서의 희망을 발견하고, 또 실현하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한 좌절을 부르기도 한다. 실현할 수 없는 꿈,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을 짓는 인간은 애초 비극적 존재, 그 자체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이 발견하고 실현코자한 그 모든 것들, 곧 행위로서의 꿈, 희망, 설령 고통까지도 즉 인간의 삶 자체가 애초 부당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미다스 왕의 질문에 현자 실레노스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고 무로 존재하는 것이며, 차선은 바로 죽는 것이다”고 답했다.

이렇게 보면 인간에게 자살은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탈출이다. 개 중에는 단순히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을 기도하는 자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존재의 탈출에 이른다. 한편 존재의 탈출은 앞서 말한 삶의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곧 희망을 실현해 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 역시 미망으로서 최종 순간에 인간을 허망에 도달하도록 유도하는 속임수일 뿐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에게 자살은 진지한 생명에의 마지막 욕구의 발로라는 사실이다. 이로서 인간은 언제나 자살의 강한 유혹 속에 있다. 더군다나 인간의 이러한 경향은 애당초 원초적이며 본질적이다.

두산 그룹 박용오 전 회장의 죽음, 우리는 그의 자살로부터 그의 삶이 그동안 빚어놓은 그 모든 것들조차 안타까움을 넘어 허망한 것임을 비로소 알았다. / 2009.11.5 / 시인 정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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