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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의 변신, '사상(思想) 전향' 딱지 못 떼
이재오의 변신, '사상(思想) 전향' 딱지 못 떼
  • 이흥섭 기자
  • 승인 2010.07.29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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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의 대부에서 보수정당의 대부로

이재오의 변신, 사상(思想) 전향의 딱지 못 떼

지난 18대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전 대표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하고 미국행을 했던 이재오 당선자가 28일 끝난 재선거에서 자신을 연거푸 3선을 만들어 줬던 서울 은평을에서 민주당 장상 후보를 큰 표차이로 제치고 4번째 국회에 입성했다.

당초 한나라당 이재오 당선자는 야권의 막판 후보단일화와 투표율 상승으로 장상 후보와 초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 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나 홀로 선거운동의 힘빨이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어 간 것 같다.

물론 이재오 당선자의 당선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민주당 등 야당의 안일한 선거전략이다. 민주당 등 야권은 힘겹게 선거일 이틀을 앞두고 단일화에 성공 했으나 지난 지방선거 승리의 단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의 성희롱 사건과 총리실의 민간이 사찰 사건 그리고 4대강 사업 추진 반대 등 줄곧 네가티브 전략에 매달린 것이 가장 큰 패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민주당은 특히 이재오 당선자의 이번 선거 승리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이지만 반바면 민주당은 서울 은평을 선거 패배라는 한방으로 오는 9월 있을 전당대회를 앞두고 주류와 비주류간 대립을 불러 왔고, 지방선거 승리로 기선을 잡았던 정세균 대표 체제는 큰 상처를 안게 됐다.

이번 7.28재선거에서 총선 패배의 아픔을 딛고 원내 진입에 성공한 이 당선자는 명실 상부한 친이계의 대부로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을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이며, 친이계의 상징적이고 인물로 한나라당내에서도 그의 입성에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지난 17대 대선 경선 과정에서 친박계와 달리 이렀다할 당내 지지세가 없었던 이명박 대통령을 당당히 경선에서 승리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당시 당내 주류이던 친박계의 파상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과 전략을 만든 사람이 바로 이재오 당선자고 보면 그의 뚝심과 계략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재오 당선자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지난 70~8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재야 인사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재오 당선자는 중앙대 출신으로 서슬 퍼런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 민족,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제도 정치권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오랜 인연을 맺고 있었고, 이 대통령과는 1960년대 말 처음 인연을 맺었지만 그후 이들의 행보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에 입사에 현대건설의 신화적 존재로 커나가고 있었고, 이재오는 박정희 정권의 폭압정치에 맞서 싸우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수십 번의 수배와 수감 생활을 반복하는 그야말로 민주화 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 당선자의 민주화운동의 화려한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의 정점에 이르고 있던 1971년 민주수호 청년협의회장직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사찰 대상으로 지목받게 되고, 국제 사면 위원회(엠네스티)한국위원회 사무국장을 거쳐 고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그리고 김근태 현 민주당 사무총장, 유인태 전 민주당 의원 등 이름만 거명해도 알만한 인사들과 ‘민주 통일 민중운동 연합(민통련)의 민족통일위원장을 지냈고, 서울 민통련 의장과 민민협 상임의장, 전국 민족 민주 운동연합(전민련)조국통일위원장 등 그의 민주화 운동 경력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김문수 현 경기도지사와 함께 1991년 진보정당인 민중의 당을 창당해 초대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14대 총선을 통해 제도권 정치에 문을 두드리지만 김문수 지사와 함께 진보정당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김문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집권당이던 신한국당에 입당하면서 운동권에 엄청난 충격을 안기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화려하게 보수 정치인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결국 자신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이재오 당선자와 김문수 지사는 이른바 민족민족진영으로부터 상당한 비난을 감수하면서 15대 총선에서 집권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은평에 출마해 서울 최다 득표율로 첫 여의도 입성에 성공하면서 이른바 ‘왕의 남자’라 불릴 정도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 되지만 아직도 김문수 경기지사와 함께 그에게는 ‘전향’내지는 ‘화려한 배신자’이라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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