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7:30 (토)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외세를 물리친 베트남 국부 호치민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외세를 물리친 베트남 국부 호치민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2.03 07: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진혁 작가] 베트남 초대 주석. 혁명가,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다.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다. 베트민을 조직하여 프랑스와 일본에 의해 지배받던 식민지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었으며, 이후 미국과의 전쟁을 통한 베트남의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INTRO: 민족해방의 영웅, 청빈한 삶을 산 문화인

세계 역사에서 베트남의 호치민처럼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지도자는 드물다. 그는 베트남의 독립을 이끌고 베트남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조국에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다.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아 그가 죽을 때 남긴 것은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민족해방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문화인이다. 국민을 “다스림”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국민은 항상 “함께, 더불어”의 대상이었다.

그의 사상 근저에는 “함께 산다, 함께 먹는다, 함께 일한다.” 일생의 목표로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위해 개인적인 삶을 모조리 내버린 채, 평생을 헌신해 온 투사다.

그의 실리주의, 냉철과 치밀한 정치적 행보, 공산주의 이념에 치중하지 않고,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절묘한 외교를 통해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었다.

호치민은 죽기 전 유언으로 "화장하여 베트남 전국에 뿌리고 무덤도 만들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베트남 국민들은 그의 시신을 미이라로 처리해 영구 보존하고 있다.

생애 및 업적: 남들에게 친절하였고 소박함과 자기를 자랑하지 않은 성품

베트남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었지만,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과 불복종으로 해직된다. 현실에 실망한 그는 이후 시골에서 약제사로 여생을 보냈다.

호치민은 늘 베트남 사람들의 독립을 생각했다.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 빵가게 등으로 일했고, 흑인 인권운동에도 참여했다. 그 밖에도 신문물과 사상 등을 배워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호치민은 잠시 민족주의자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매우 인기 있는 교사였다. 학생들을 항상 존중했고, 다른 교사들에게도 때리거나 윽박지르지 말라고 충고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하얀 파자마와 나무 샌들 차림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베트남 국부 호치민./출처=픽사베이
베트남 국부 호치민./출처=픽사베이

호치민은 공산국가로 베트남을 통일했지만, 독재자가 아닌 ‘호 아저씨’라 불리기를 좋아했다. 

호치민은 1918년에는 베르사유 회의에 우국지사들과 응우옌아이꾸옥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민주·평등권을 요구하고,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베르사유 회의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젊은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을 얻는다.

1920년에 호치민은 프랑스 공산당에 창당 관여 및 가입을 하여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에 입문한다.

1923년에 식민지 농민 대표 자격으로 소련에 건너가 국제공산당에서 일했다. 홍콩으로 건너가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하였기에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했다.

1938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과 1941년 30년 만에 고국인 베트남으로 귀국. 그는 베트민을 통한 전국적인 총봉기와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하노이 봉기에서만 총 10만 명이 봉기에 참여하여 일본군 철수와 프랑스 식민 통치 종결, 바오다이 황제 폐위를 요구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에는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군과 남에는 영국군과 프랑스 같이 들어왔다.

1946년 11월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민간인 6000명이 학살당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49년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지원으로 프랑스를 몰아내고, 호찌민은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이 된다.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군했고, 제네바 협약에 따라 1954년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점으로 분단됐다.

남북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선거를 해야했으나 모든 베트남 국민들은 호치민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호찌민의 압승이 예상되었고, 사실상 미국의 괴뢰정부였던 응오딘지엠 정권은 당연히 베트남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제네바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우익 반공독재를 시작한다.

호치민은 토지개혁을 마무리했지만 남 베트남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했다.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남부인들 출신들로 구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응오딘지엠 독재정권 타토라는 목표하에 창설한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에 진다.

호치민은 1969년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심장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죽고 5년 후인 1975년 남베트남은 망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으로 통일된다.

에피소드: 죽어서 신(神)이 된 남자

#1. 유능한 지휘관이지만 툭하면 부하를 때리는 장군이 있었다. 호 아저씨는 그 장군을 주석 집무실로 불러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복잡한 나랏일을 항상 침착하고 온화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갑자기 장군의 뺨을 때렸다. 장군은 얼떨결에 당하고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맞는 심정이 어떠냐고. 이어서 호 아저씨는 부드럽게 당부했다. 부대에 돌아가거든 부하를 때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2. 1965년 미국의 참전으로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학생들을 전쟁터 대신에 해외로 유학 보내면서 남긴 명언 “정부가 어려워서 너희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지만, 너희들은 지금 전쟁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는 것이다.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분명하지만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국의 많은 인재들이 희생될 것이고 너희들의 부모 형제들도 죽어갈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이 할아버지가 너희들에게 받아두어야 할 약속이 꼭 하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희들은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돌아와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

#3.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낡은 옷을 기워서 입기가 일쑤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

또한 식사도 3찬만을 고수했다. 왜 3찬 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