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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지의 작가 펄벅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지의 작가 펄벅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4.2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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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INTRO: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지>의 작가

대지는 중국인의 삶과 농민들의 순박한 모습을 그려낸 걸작. 중화민국이 출범할 무렵의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빈농인 왕릉일가의 변천을 그린 작품이다.

강인한 중국 민중과 근대 중국의 중요 문제에 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작가로서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생애: 푸른 눈의 중국인으로 산 반평생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권운동가 펄 벅은 중국에서 10여 년의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훗날 소설 <대지>를 써 미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동양과 서양, 여성과 아이, 인종을 아우르는 열정적인 사회 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펄은 중국에서 자랐기에 미국은 그저 모국일 뿐 피상적인 이미지의 나라였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중국이 고향으로 느꼈고, 중국 사람들과 더욱 친숙하게 지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중국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중국을 가까이 느낀다고 하여도 중국인들에게 그녀는 벽안(碧眼)의 서양인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는 근본주의 엄격한 선교사로서 중국인들과 자신들의 삶을 확실히 분리하였다.

대학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펄은 미국인 농학자인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고 벅이라는 성을 얻었다.

하지만 남편 로싱 벅은 여성에게 다감한 남자가 아니었고, 자신의 일에만 열정적이었다. 남편의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불만과 태어난 딸 캐롤의 정신지체아로 고통받았다. 이런 죄책감을 잊기 위해 펄 벅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30년 그녀의 처녀작 <동풍 서풍>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로, 미국에서 출간된 지 1년이 채 안 되어 3번이나 인쇄하는 인기몰이를 하였다. 1931년 출판된 소설 <대지>로 인해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부와 명성을 주었다.

<대지>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스웨덴의 노벨상 심사위원들은 그 해의 문학상으로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 [대지]를 결정하였다.

1934년 딸 캐롤과 입양한 딸 재니스를 데리고 미국에 돌아온 후 펄 벅은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더불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사회 인권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작품 세계: 대부호의 몰락과 대지주 등장

<대지>는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주인공 왕룽을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들들의 역사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대지>는 왕룽이 죽은 후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나이 많은 아버지와 살면서 홀로 농사를 짓던 왕룽은 황부잣집 하녀인 오란을 아내로 맞는다. 그녀는 몸이 튼튼하고 성실하고 우직한 여자였다.

왕룽은 오란과 결혼한 후 자신의 삶이 호강스럽다고 느낀다. 얼마 후 오란이 산파도 없이 혼자 아이를 낳고 다음 날에는 밭일을 하러 나간다.

부지런한 오란 덕분에 살림이 점점 풍성해져 가던 중에 심각한 기근으로 남방으로 떠난다. 오란과 아이들은 구걸하고 왕룽은 인력거꾼이 된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남방 땅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부잣집 벽에 숨겨둔 보석 주머니를 찾았다. 그 덕에 왕룽의 가족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왕룽은 오란이 남방에서 가져온 보석을 팔아 황부잣집의 땅을 조금씩 사들인다. 왕룽은 마침내 대지주가 된다.

여유가 생기자, 왕룽은 기생에게 빠진다. 그즈음 오란에게 병이 찾아오고 결국 죽고 만다. 자신이 원하던 것들을 대부분 소유한 왕룽은 맏아들을 학자로, 둘째를 상인으로, 셋째는 농부로 키우려고 하지만 아들들은 서로 다투고 가출하는 등 왕룽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왕룽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고, 자신들이 물려받을 땅을 서로 나누고 그 땅을 팔 계획을 세운다.

출처=부천문화재단
출처=부천문화재단

에피소드: 남을 돕는 일에 열정으로 일평생 바치다.

#1. 그녀는 1930년대 미국 내 인종 차별에 반기를 들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1942년에는 민족 간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동서협회(The East and West Association) 설립하였고 1949년에는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웰컴하우스를 창설하였다. 그녀도 이 기관을 통해 7명의 피부색이 각기 다른 아이를 입양하였다.

#2.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주둔한 뒤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 펄 벅 재단(Pearl S. Buck International)을 세웠다. 이 재단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의 중국계 아내 호미리의 도움이 있었다.

펄 벅 재단은 한국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1개의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데 현재는 혼혈 아동뿐만 아니라 고아, 신체장애우 등 사회에서 고통받는 소외 아동을 도왔다.

#3. 펄 벅에 대한 엇갈린 평가, 그녀의 소설들은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문단에서는 반응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의 평론가 일부는 [대지]가 어쩌다 우연히 노벨상을 타게 된 작품이라고 폄하하였다.

또한 그녀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은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및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중국 및 공산권의 미움도 샀다.

펄 벅은 닉슨 대통령 때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될 시기 중국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그녀의 반공산주의적 입장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거부로 방문은 끝내 무산되었다.

어록: 세계적인 인권 사회운동을 펼치다.

“우리는 땅을 파먹고 살아왔어. 그리고 또다시 땅속으로 돌아가야 돼. 너희들도 땅만 가지면 살 수 있어. 누구라도 땅만은 빼앗을 수 없어”-대지, 왕룽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말

“모든 큰 실수에는 이를 다시 불러와서 어쩌면 바로잡을 수 있는 찰나의 순간, 중간 지점이 존재한다.”

“좋은 결혼생활은 개인의 변화와 성장,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와 성장을 가능하게 해준다.”

“침묵은 그 어떤 노래보다 더 음악적이다.”

“키스해 주는 어머니도 있고 꾸중하는 어머니도 있지만 사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질서 있는 모습이 아름다움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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