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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6.0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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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INTRO: 강력한 휴머니즘을 소유한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겸 극작가. 낭만주의자로 방대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이면서 재능 넘치는 데생 화가, 정치인으로 만인의 연인.

16년간 썼던 불후의 걸작 <레미제라불>은 지금도 공연되고 있음. 그가 죽자 국민적인 대시인으로 추앙되어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판테온에 묻혔다.

생애: 사회의 악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빅토르 마리 위고는 1802년 2월 26일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군인으로 출세 가도를 달려 장군까지 진급한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여러 도시로 이사 다녔다.

훗날 부친의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해서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빅토르는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위고는 불과 14세 나이로 당대의 저명한 작가 겸 정치가 프랑수아 샤토브리앙을 부러워하면서 장래의 포부를 밝혔다. “샤토브리앙처럼 되고 싶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다.”위고는 소꿉친구인 아델 푸셰와 결혼하고 첫 시집 [오드](1822)를 냈고, 희곡 [크롬웰](1827)을 간행하고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크롬웰]은 고전주의 연극의 신조였던 이른바 ‘삼일치의 법칙’(행위, 시간, 장소의 통일)을 과감히 깨트린 작품이다.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1831)은 소설가로서 위고의 명성을 확고히 해 주었다. 위고의 사생활은 깨끗지 못해 수많은 여인과 외도를 즐겼다. 1841년에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843년 가을에 제일 아끼던 딸 레오폴딘이 익사하는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우울증에 시달린 위고는 작품 활동을 한동안 중단한다. 그 대신 정치 활동에 관심을 갖고 1845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지만, 여배우 레오니 당트와의 간통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다. 이후 그는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한 채 대작 [레 미제라블]의 집필에 몰두한다.

1848년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위고는 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곧이어 반동 정치가 시작되자 격렬하게 정부를 비판한다.

1851년 12월에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한다. 망명 중에도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던 위고는 결국 벨기에에서 추방된다.

1859년에 루이 나폴레옹의 사면령에도 위고는 여전히 망명지에 남아서 작품을 썼다.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정관시집](1856)을 비롯해서 [세기의 전설](1859),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1866), [웃는 남자](1869) 등의 대표작을 연이어 간행된다.

1870년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이 몰락하자, 위고는 밤에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와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다.

1881년 2월 26일, 위고의 80세 생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중이 그의 집을 찾아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 위고는 8월 31일에 유언장을 썼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검은빛이 보인다.” 죽던 밤에 파리에는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유해는 판테온에 안장되었다.

빅토르 위고./출처=픽사베이
빅토르 위고./출처=픽사베이

작품세계: 인간 삶과 세상을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

레 미제라불은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낸 이들에게 대한 작가의 분노 표출로 2천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다. 프랑스 배경으로 소설 속 주인공인 장발장은 일곱명의 조카와 누나. 배고픈 그들을 먹이기 위해 훔친 빵으로 5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탈옥을 시도하다 결국 19년간 옥살이를 했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모두가 기피했지만, 신부의 용서와 사랑으로 진정한 성인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산다.

이와 반대로 한번 전과자는 영원한 전과자라며 오로지 본인의 직무에만 전념하며 평생에 걸쳐 장발장을 쫓던 형사는 법보단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준 장발장의 마음에 흔들려 자살한다.

소설을 쓴 이유로 “단테가 시에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집필 당시에는 제목이 [레 미제르](Les Misères, 비참함)였지만, 나중에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불쌍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레 미제라블]은 서사시와 소설, 그리고 에세이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상황과 자연이 창조해낸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이렇게 말한다. “위고는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디킨스처럼 보편성을 추구한 작가들 가운데 마지막에 속한다. 나는 20세기에 위고와 견줄 만한 작가가 없다고 생각하며, 21세기에도 그런 작가가 나올지 의심스럽다. 오늘날은 뮤지컬로 유명한 [레 미제라블]이 1862년에 처음 출간되었을 때, 글을 아는 프랑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책을 읽었다. (내가) 일흔한 살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뮤지컬로 만들지 못할 (문학) 작품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뮤지컬 햄릿]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리어 왕 쇼] 같은 것도 없다.”

명문장: 카르마(업)는 돌고 돌아 자기에게 온다

“형무소가 죄인을 만들어낸다. 평등의 첫 번째는 공정함이다.”
“개혁의식은 일종의 도덕의식이다. 진보야말로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에피소드: 자유와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빵이다.

#1. [레 미제라블]의 분량이 길어서 완독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레 미제라블]을 처음 접한 사람은 두 번 놀란다. 첫째로는 그 방대한 양에 놀라고, 둘째로는 그 유명한 줄거리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장 발장에 관한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도 3분의 1에 불과하고, 나머지 3분의 2에서는 19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와 풍습, 그리고 다양한 문제에 관한 저자의 견해가 서술되어 있다.

#2. 빵은 생명과도 같다. 서양 사람들은 빵을 칼이 아닌 손으로 쪼개 먹는다. 이유인즉 기독교 문화권에 따른 예의다. 빵이‘예수의 몸’을 상징하기 때문에 칼을 대지 않는다. 장발장이 그런 빵 하나를 훔쳤다는 이유로 19년간 감옥에 갇힌다.

#3.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고품질의 빵을 배급했다고 한다. “군대는 배가 불러야 진격한다”는 말대로, 식량보급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하지만 러시아를 공격하다가 군대에 빵 배급을 하지 못하게 되자, 나폴레옹은 “빵만 충분했다면 러시아를 쳐부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탄식했다.

#4. 히틀러가 청년 시절에 굶주린 나머지 어느 유대인 집 앞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이를 본 유대인 처녀가 2층에서 빵을 한 조각 던져 준다. 히틀러가 허겁지겁 먹는다. 정신을 차린 히틀러가 유대인의 빵임을 알고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토한다.

유대인 처녀가 자비심을 발휘하여 히틀러를 안아 일으키고 빵과 물을 먹여주었더라면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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