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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정신분석학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정신분석학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7.07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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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INTRO: 무명의 생리학자에서 정신분석의 창시자로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프로이트(S. Freud, 1856~1939)는 정신분석학 창시자. 유물론 일반과 심적, 객관적인 방법을 부정하고 인간의 행동이 합리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무의식이 행동과 정서를 규정한다는 주관적 이론을 세웠다. 

생애: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구강암으로 사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의 작은 도시 프라이베르크 출생. 그의 아버지는 유대계 사업가로 40세 때 20세의 여성과 재혼해 7명의 자녀를 두었고 프로이트는 그중 맏이다. 유년 시절 비교적 인종차별이 작은 빈으로 이주.

그곳 대학에서 의학 수업받음, 1938년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 빈 의과대학에 생리학을 전공한 프로이트는 어류와 갑각류 등의 신경계 구조를 연구해 1881년에 학위를 받았다. 1882년에 아내를 만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연구직을 포기하고 빈 종합병원에서 일한다.

1885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고, 저명한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1825-1893)로부터 최면술을 이용한 여성의 히스테리 치료를 배워서 1886년에 빈으로 돌아와서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신경질환 전문의로 개업한다.

프로이트는 이비인후과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1858-1928)의 도움으로 이른바 과학적 심리학의 이론을 구상하고 1896년에 자신의 방법을 ‘정신분석’으로 명명한다.

또한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스스로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한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1899),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1905) 등의 저서로 정신질환자가 아닌 일반인의 심리 분석을 통한 인간 무의식의 근본 구조를 규명한다.

자신의 연구에 공감하는 전문가들과 함께 1902년에 수요 심리학회를 창설하고,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 칼 융(1875-1961)과 같은 촉망 받는 정신의학자들과 교류한다.

1910∼20년대에는 세계 각지에 정신분석학회가 설립되면서 프로이트의 명성도 높아졌지만, 아들러와 융을 비롯한 차세대 정신의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의견에 반대해 연이어 결별을 선언했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유대계인 프로이트의 저서를 공개 화형한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그는 망명에 오른다. 암이 재발하여 통증으로 고생하다가 1939년 망명지인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사상: 무의식의 발견과 그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은 무의식의 발견이다. 히스테리의 원인은 보통 어린 시절의 충격적 경험(트라우마)과 성(性)과 연관된 것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가 억압을 통해 무의식으로 가라앉는다.

히스테리 환자는 최면술, 압박술, 자유연상 등의 치료를 사용하고, 정신상태를 에고(자아)-이드(그것)-슈퍼에고(초자아)로 나눈다. 특히 그는 성적 충동(리비도)를 모든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모든 행동을 성으로 설명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발달 단계로 구강기(입으로부터 성적 쾌감을 얻는 시기), 항문기(항문으로부터 성적 쾌감을 얻는 시기), 남근기(남성의 성기에 관심을 갖는 시기) 등으로 구분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출처=픽사베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출처=픽사베이

프로이트에 대한 평가: 혁명적 이론인가 사이비 과학인가?

프로이트의 업적은 한마디로 혁명적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보다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우리의 내면에는 ‘자아’라는 단단하고 확고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남성의 성만을 주장하고 성(性)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해 프로이트의 사상이 초기에 냉대를 받았다. 일각에서는 정신분석이 사이비 과학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자신의 이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을 의식한 듯, 프로이트는 말년에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감히 선생님의 주장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심리학을 모르는 사람조차도 제 주장에 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아인슈타인 선생님께서는 정말 복 받으신 분입니다.”

에피소드: 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무신론자

#1. 그의 막내딸 안나 프로이트(1895-1982)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으며 특히 아동 심리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말년에 간호와 비서 노릇을 도맡았으며, 아버지의 사후에 사실상의 유언집행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1933년에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세계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아인슈타인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대계였으며, 나치의 탄압을 피해 훗날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아가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와 평화주의자였다.

#3. 프로이트는 인간의 원초적 마음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냥 '그것(It, 독일어로는 Es)'으로 불렀다. 인간은 칭찬해야 할 대상도 자기 자신이고, 크게 꾸짖고 물리쳐야 할 대상도 자기 자신이다.

#4. 프로이트는 시가 체인 스모커로 구개암에 걸려 사망했다. 문학은 담배연기를 먹고 태어난다고 말도 있다. 프로이트는 "나는 가벼운 술 한잔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고 이야기했다. 19세기 말의 비엔나, 그의 응접실에서는 매주 수요일 밤 10명의 사람들이 인간의 정신을 토론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어록: 불가지(不可知)의 심적인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행복감은 억눌린 욕구가 갑자기 충족됐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아주 오랜 옛날, 말과 마법은 본래 하나였다. 오늘날에도 말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이 우리의 행동과 정서를 규정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꿈조차 의미로 가득차 있다. 꿈을 해석하는 것은 그 의미를 삶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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