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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건축에 자연을 입힌 안토니 가우디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건축에 자연을 입힌 안토니 가우디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7.21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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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INTRO: 현대건축에 예술성을 꽃 피우다.

에스파냐의 건축가. 벽과 천장의 곡선미를 살리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를 사용하는 건축가. 미로와 같은 구엘공원, 파밀리아성당 등이 대표 유명한 작품이다. 자기만의 독특하고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을 가졌다.

생애: 운명적 경이로운 만남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리우돔스 마을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류마티스를 앓아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몸이 약했고, 학교 성적도 좋지 못했지만,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나서 건축가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25세에 건축사 자격을 딴 후 시청 산하의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받으면서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다.

혈기왕성한 청춘의 시기에는 밤마다 거리를 누비며 놀러 다녔는데 본인이 좋아서 가는 것도 있었겠지만 인맥을 넓히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1878년 카사 비센스를 건축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 후 카탈루냐의 명문가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83년에는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다. 1883년부터는 평생 설계한 '성가정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이런저런 재정 문제 등으로 완공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우디 본인도 성당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완성되리라곤 장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슬프게도 나는 내 손으로 이 성당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후손들이, 다음 건축가가 이 건축물을 완성시키고 이곳에 빛을 내려주리라"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고 한다.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카탈루냐 법원 인근의 대로를 건너다 노면 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전차의 운전사는 가우디를 지저분한 노숙자로 여겨 그냥 길가에 끌어다 놓았다. 치료 시기를 놓친 것이다.

그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는 말과 함께 7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장례식은 사실상 반(半)국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가정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작품세계: 예술적인 감성과 치밀한 공학을 조화시킨 천재

가우디의 건축은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 추앙받고 있다. 당대의 주류였던 모더니즘에서 벗어난 완전 독자적인 외딴 섬 같은 건축이었다. 가우디만의 고유한 양식으로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만들었다.

독특하고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 역시 가지고 있다. 일견 멋으로만 보이는 둥근 천장과 나무 같은 기둥들은 무게, 즉 힘의 흐름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된 효율적인 구조가 더해졌다.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무에서도 직접 미장공이나 타일공을 섭외하는 등 일련의 과정에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 썼다.

대표적 작품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거대한 옥수수 4개가 하늘로 치솟고 있는 듯한 작품으로 1882년 3월 19일 성 요셉의 날에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 건축 중에 있다.

카사 밀라의 외부는 거대한 조각 돌덩어리로 직선을 배제하고 일그러진 곡선을 강조했다. 동굴처럼 솟아난 발코니와 창문이 만들어내는 물결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개인주택이다.

에피소드: 끊임없이 상상하는 건축가

#1. 술을 잘 못마시는 대신 줄담배를 피웠다는데 골초였던 듯하다. 함께 일하던 조각가 로렌소가 "연기 때문에 모형이 뿌옇게 보인다"라고 말했을 정도.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는지, 41살에 단식으로 생명이 위태롭던 시기에도 담배만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2. 일하던 현장에서 처음 만난 '페피타'라는 여성을 사모한 적이 있는데 5년 동안 매주 일요일이면 늘 그녀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한참 만나던 시기 그녀는 이혼조정 중이었는데, 이혼이 성립된 때에 가우디가 청혼을 했으나 페피타의 손엔 이미 다른 남자가 끼워준 약혼반지가 있었다. 실연의 충격으로 이후 가우디가 어떤 사람과도 연애하지 않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3. 평소 건축적인 영감을 거대한 자연에서 많이 얻었고, 숲과 나무를 본 뜬 작업이 많은 편이다. 또한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였다.

#4. 데뷔 당시 신인으로, 어쩌다 들어오는 일이라고는 점포장식이 고작이었다. 인맥의 중요성을 느낀 그는 카탈루냐주의 과학적 탐방협회에 참여하고, 협회 임원에도 입후보하며 내키지 않는 집필활동과 행사에도 매번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5. 말년엔 성가정 대성당 건설에 매진하여 두문불출했다. 이로 인해 가우디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에피소드: 벽과 천장의 곡선미를 살리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를 사용하다.

#1. 가우디는 대부분의 건축가들처럼 책상에 앉아 설계하고 공사는 인부에게 맡기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진행상황을 보면서 설계하고, 인부들의 일을 일일이 직접 감독했다. 생각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공사기일 공사비에 관계없이 부수는 일을 반복했다.

#2. 젊었을 적에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교회 관련 건축 일을 하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을 때엔 성당 내 사무실에서 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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