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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신도 기뻐할 동방의 등불 시성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신도 기뻐할 동방의 등불 시성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8.18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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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INTRO: 히말라야에서 얻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인도 시인. 벵골 문예 부흥의 중심을 이루었고, 시집 <기탄잘리>로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6세 첫 시집 <들꽃>을 냈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이었으나 갈수록 현실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교육 및 독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생애: 식민지 시기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아시아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는 인도 벵골주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은 힌두교 개혁에 관심을 두었다.

타고르의 어머니는 그의 어린 시절에 죽고, 아버지는 줄곧 여행하는 바람에 하인들에 의해 자라났다. 그의 집안은 문학 잡지의 출판사로 맏형은 존경받는 철학자이자 시인이다. 다른 형제는 음악가, 작곡가, 극작가이고 여동생은 소설가다.

막내로 태어났기에 다섯째 형이 부모 노릇을 대신해 주었다. 타고르는 8세에 처음으로 시를 썼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억압적이고 무미건조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성적은 바닥에 머물렀다.

12세 때에 부친을 따라 히말라야 여행을 다녀온다. 14세 때인 1875년에 정규 교육을 포기한다. 친척들의 사회문화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로 일컬어지는‘벵골 르네상스’에 참여한다.

1878년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입학했지만, 이곳에서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부친의 명령에 따라 가족 재산 관리를 담당하는 한편 시, 희곡, 단편소설, 비평, 수필 등 여러 가지 분야의 작품을 발표한다.

22세인 1883년에는 10세의 평범한 소녀 바바타리니를 아내로 맞이했고 두 사람은 이후 17년 동안 함께 살며 5명의 자녀를 낳았다. 타고르는 1901년에 사재를 털어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설립했고, 1912년에는 인근 스리니케탄에 농업 공동체를 설립했다.

교육 및 농업 분야에서의 이런 개혁은 간디보다 20년, 인도 정부보다 5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타고르는 훗날 노벨문학상으로 받은 상금 전액을 그 운영비용으로 쾌척할 정도로 큰 애정을 쏟고 일생일대의 사업으로 여겼다. 특히 타고르는 인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계몽하지 않고는 어떤 변혁도 힘들다는 자각을 지녔다.

하지만 이 때 타고르에게 큰 시련이 다가왔다. 아내와 부친, 심지어 아들과 딸이 수년 사이에 연이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학교 및 공동체 사업도 재정난에 부딪치고 말았다.

결국 타고르는 그때까지 나온 저서의 판권을 헐값에 출판사에 넘기게 된다. 10여 년간 겪었던 온갖 고통과 울분은 50여 편의 시로 승화시켜 해외에 알린다.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기탄잘리(獻詩)>였다.

간디는 정치에서 정의를 추구한 반면에 타고르는 문학에서 미를 추구했다. “타고르는 산과 같은 인물이었고, 간디는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내려오는 폭포 같은 인물이었다.”라는 평이 있다. 간디는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 불리고 타고르는 ‘마하르시’(위대한 성자)라는 호칭을 얻었다.

1919년 4월 13일, 인도인 수백 명이 시위 중에 영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터지자 분격한 타고르는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영국에서 받은 작위를 총독에게 반납했다.

이후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다. 1940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41년 병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타고르는 생전에 죽음을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저 평화로운 바다에/ 위대한 조타수가 배를 띄우네
그대 영원한 반려자여/ 죽음의 사슬이 사라지고
광대한 우주의 품에 그대 안기리/ 두려움 모르는 그대 가슴 속에서
위대한 미지를 감지하리.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작품세계: 순수와 영혼이 맑은 조국애

타고르는 인도 문학을 서양에 소개하였다. 타고르는 고전적 형식을 버리고 벵골 예술을 현대화했고 소설, 이야기, 시, 수필 등을 정치적인 주제를 다뤘다. 그의 이야기는 서정성, 구어체, 자연주의로 호평받았다

시집 <기탄잘리>는 산문시로 각각 제목은 없고 쓴 것들을 모은 시들이다. 기트는 노래, 안잘리는 두 손 모아 바친다는 의미다. 타고르의 활동시기인 20세기 초반은 격동의 시절이었다. 

그의 출신지인 벵골에서는 1905년에는 동서 분리가 이루어지고, 1915년에는 수도가 캘커타에서 델리로 이전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도 본격화되어 1898년에 난동금지법이 통과되었다.

간디는 8세 연상인 타고르를 ‘구르데브’(위대한 스승)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그러나 인도의 독립을 향한 길이 무엇이냐를 놓고서는 의견이 갈렸다.

간디는 귀국 직후부터 타고르를 찾아와 여러 차례 자신이 벌이는 투쟁에 대한 동참과 지지를 요청했지만, 타고르는 끝까지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간디의 독립이란 대의명분은 지지했지만, 간디의 노선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오히려 정신의 근대화를 지지했고, 격하기 쉬운 인도인의 기질에서 선민주의나 비합리성을 배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타고르의 시는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성향을 지녔고, 단편소설은 농민의 삶을 소재로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는 유색인종의 수상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기사가 나왔다.

타고르 본인도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의 불편함을 표시했다. “이 사람들은 나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붙은 명예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타고르는 훗날 자기 작품이 모두 잊혀져도 노래는 남을 것이라고 했는데, 흥미롭게도 오늘날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가(國歌)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1929년에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에게 <동아일보> 기자가 찾아가 조선 방문을 요청했으나, 일정상 불가하다며 사과의 뜻에서 <동방의 등불> 시를 써 주었다는 일화.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명언: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사랑은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빛깔이 예쁜 그릇에 담긴 물은 고운 빛을 띠고 맑아 보이지만, 맑은 물이라도 바닷속 깊이 있을 때는 어둡게 보인다. 지식도 이와 같아 지식이 얕은 사람일수록 몹시 아는 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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