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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파블로 피카소, 입체주의를 그린 현대미술의 혁신가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파블로 피카소, 입체주의를 그린 현대미술의 혁신가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9.01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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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INTRO: 혁명적 미술의 최고 거장

스페인 태생,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파 화가. 르누아르, 툴루즈, 고갱 등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 청색시대를 거쳐 입체주의 미술 양식을 창조한,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20세기 최고의 거장. <게르니카>, <아비뇽의 처녀들>등 대표 작품.

일생: 3만여 점의 작품을 남긴 미술계의 천재이자 노력파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 그의 아버지는 미술 교사였다. 그는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급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고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여,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17세 때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고, 이 무렵부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음.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려고 노력하였다.

1900년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몽마르트 주변에서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와 합류한다. 피카소는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고,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표현주의 등에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라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기도 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고,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다.

한 때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피카소는 운이 좋아 단기간에 명성을 얻었다.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었다. 피카소의 그림 주제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의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이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1903년에 제작된 <인생>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손꼽힌다.

1904년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뀌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 예술의 독특함과 엄격성이 가미된 것이다. 당시 테마 작품은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 어릿광대나 곡예사 생활의 이면을 파헤쳤다.

1905년 피카소는 파리에서 단순화 화풍으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다. 1907년의 그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처녀들>이후 종합적 입체파 시대의 최대 거장이 되었다.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 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을 그렸다.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예리한 독자적 시각으로 그린 대벽화 <게르니카>, <통곡하는 여인>은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 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한편 도기(陶器)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창조하였다. 6·25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이 있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작품세계: 입체파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입체파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피카소는 20세기 예술 전반에 혁명을 일으키며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우울하고 고독한 느낌의 화풍인 청색 시대와 감상적이고 로맨틱한 장밋빛 시대를 거쳐 1907년 입체주의의 시작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했다. 회화뿐만 아니라 도기나 조각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였다.

1936년 스페인 내란 이후 프랑코 체제에 반대하며 스페인을 떠났지만, 1963년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 개관을 승낙하며 자신의 많은 작품을 기증하였다.

명언: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만 살아있다. 나에게 미술관을 달라. 나는 그 속을 꽉 채울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나는 찾지 않았다. 발견할 뿐이다.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일상의 먼지로부터 씻어준다.”

“무엇을 그려야할 지 모르겠다면 일단 그리기 시작하면 된다.”

“화가의 질은 그가 지니고 있는 과거의 양에 달려 있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들이 커서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에피소드: 40년이 걸렸다

#1. 어느 날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 피카소에게 여성이 다가와 자기 손수건에다 그림 하나를 그려달라고 청했다. 그 대가로 원하는 대로 기꺼이 내겠다고 했다. 피카소는 그 청을 받아 그림을 완성한 후 1만 달러를 청구했다.

너무 비싼 가격에 놀라며 “당신은 이 그림 그리는 데에는 30초밖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피카소는 점잖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그리기까지는 40년이 걸렸습니다.”

#2. 피카소는 갓 태어났을 때 그는 죽은 것처럼 보였고, 산파는 사산아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꼼짝도 하지 않는 아기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때 아기의 삼촌이 호기심이 생겨 재미삼아 그가 피우고 있던 시가 담배 연기를 아기의 얼굴에 훅 내뿜었다.

그러자 그 순간 아기가 기침을 하면서 가사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피카소는 평생 애연가였다.

#3. “일이 곧 휴식”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을 만큼 피카소는 미친 듯이 창작에 전념했다. 하루에 최대 14점의 유화를 그리기도 했다.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서인지 몸 파는 여인들을 가까이 한 결과 그만 성병에 걸렸다.

성병을 치료해준 의사에게 감사 표시로 청색시대의 그림을 치료비로 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치료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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