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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월트 디즈니, 미키마우스 세상을 펼치다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월트 디즈니, 미키마우스 세상을 펼치다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9.08 0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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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INTRO: 만화로 꿈과 사랑을 전파시키다

애니메이터이자 영화감독, 기업인.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창업 이래 600여 편의 걸작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어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미키마우스의 아버지’인 그는 26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한 성공인이었지만, 늘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았다.

생애: 작은 것에서 꿈을 이루다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스페인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남. 어릴 때부터 월트는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미술학교에 다니고 싶어했지만, 당시 그의 집은 가난하여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고, 아버지 역시 반대하였다.

월트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신문팔이로 생계 유지. 반면 신문에 나온 만화를 많이 볼 기회가 생기자 아버지를 설득하여 근처의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일설에 따르면 불행히도 그의 아버지는 경계성 인격 장애로 자녀를 아무 이유 없이 혼내거나 때리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일도 모를 정도였다. 월트 디즈니는 맨바닥에서 일어선 자수성가의 삶을 가졌다. 1920년 광고대행사에서 광고사진을 찍으면서 모은 돈으로 1923년 지금의 디즈니사를 만든다.

광고 만화 '미키 마우스'를 만들어 인기를 높였다. 그 뒤 <미키> <도널드> 등 많은 만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삼원색 방식에 의한 최초의 천연색 영화인 <숲의 아침>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 뒤에도 <돼지 삼형제>를 비롯하여 많은 걸작 만화를 만들었다.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제작하여 개봉하여, 당대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이 밖에도 자연 과학 영화, 기행 단편 영화, 기록 영화 등 수많은 우수한 영화를 제작하였다. 1955년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디즈니랜드라는 거대한 어린이 유원지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자 이상의 사업가로서도 자리를 굳혔다.

그가 영화 업계와 세계 오락 산업에 미친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방대하게 남아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그를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유명한 비정치적 공인'이라고 일컬었다. 1966년 폐암 말기로 진단받고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업적: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

19세 때 캔자스에서 친구와 종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여 파산한 후 1923년 할리우드로 나가 형 로이와 손잡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토끼와 오즈월드> 등의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 뒤 <미키 마우스>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증기선 윌리호(號)>(1928)를 최초의 유성만화영화로 발표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어서 <실리 심포니> 시리즈 가운데서는 최초의 3원색 테크닉 컬러에 의한 색채만화 <숲의 아침>(1932)으로 아카데미상(賞)을 획득, 이후 1930년대 만화영화 부문의 상을 독점하는 등 누구도 생각지 않았고 일을 이루었다.

명언: 내 모든 것은 꿈과 생쥐 한 마리로 시작됐다.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꿈을 실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모든 것이 작은 생쥐 하나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첫째, 생각하라. 둘째, 믿어라. 셋째, 꿈꿔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덤벼들어라.”  
“꿈을 끝까지 추구할 용기가 있다면 우리의 꿈들은 모두 실현될 수 있다.”
“꿈꿀 수 있다면, 이룰 수 있다. 내 모든 것이 꿈과 생쥐 한 마리로 시작했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늘 함께 해라. 아이디어를 놓치지 말고, 제대로 구현될 때까지 굴려라.” 
“웃음은 유행을 타지 않고, 상상력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꿈은 영원하다.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게 쏠쏠한 재미다.”
“호기심이 있다면 수많은 흥미로운 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왜 걱정하는가? 최선을 다했다면, 걱정한다고 더 나아지지 않는다.”

에피소드: 뭐든지 해보겠다!

#1. 서커스단이 마을에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는데 트롬본 연주자가 갑자기 연주를 못하게 된 상황이 되었다. 긴급히 트롬본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는 데 한 소년이 손을 들었다. 밴드마스터가 “얘야 정말 불 수 있니?” 그러자 소년은“한번 해 보겠습니다.” 밴드마스터는 악대를 행진시켰다.소년의 트롬본에서 엉뚱한 소리를 내자 화가 나서 그 소년에게 물었다.“너는 트롬본을 불지도 못하면서 왜 거짓말을 했지”하지만 소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제가 트롬본을 불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뭐든지 해보려는 열정과 자신감이 훗날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

#2. 디즈니는 투자가에게 속아서 빈털터리가 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애니메이션의 황제가 됐다. 그는 세계공황이 닥쳤을 때 ‘아기돼지 삼형제’와 주제곡으로 미국 국민에게 웃음을 줬고 1937년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로 세계를 감동시켰다.

1955년에는 LA 근처에 디즈니랜드를 열어 꿈을 구현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재능을 무시당했고, 캔사스의‘자칭 전문가’로부터 만화는 소질이 없으니 다른 일을 알아보라는 ‘충고’를 받기도 했다.

#3. ‘미키마우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월트 디즈니는 실제로도 만화를 그리는 순수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을까?

디즈니사는 지금 표현으로 ‘블랙기업’이라고 할 만큼 노동자를 착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스크루지 본성으로 스튜디오 직원들의 급여를 인상하지 않으려 힘썼고 노조 결성을 금지했다. 

“여성은 창조적인 업적을 달성할 수 없다”라며 주요 인력에서 배제하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은 그 자리에서 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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