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7:30 (토)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가브리엘 코코 샤넬, 패션계의 신화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가브리엘 코코 샤넬, 패션계의 신화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09.22 14: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진혁 작가] INTRO: 여성패션에 혁신을 가져온 디자이너 겸 사업가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사업가로 샤넬의 설립자. '내가 곧 스타일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세기 여성 패션에 커다란 혁신을 불러일으킴. 그녀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고 일했다’

생애: 고아 소녀 출신이지만 자유분방이 오늘날 나를 만들었다.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샤넬은 12세에 모친이 사망하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버려져 보육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도원에서 도망친 샤넬은 친구와 함께 도시로 올라왔다. "코코"는 애칭으로 시골마을인 물랑에서 바느질하는 노동자로 고아원을 나왔다. 그후 샤넬은 그녀를 후원한 한 장교에 의해 예능계에 첫 발을 내딘다.

가수를 지망하면서 카바레에서 노래하기도 함. 파리 근교에 머물면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샤넬은 여성들의 불편한 복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모자의 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발장의 후원으로 1909년에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가게를 개업했다.

1910년에 파리의 캉봉거리 21번지에 " 샤넬 모드 "라는 모자 전문점을 개업함. 이때 발장과 헤어져 평생 연인으로 지낸 영국의 청년사업가인 아서 카펠과 교제를 시작했다.

샤넬 모드의 개업자금은 카펠의 후원이었다. 샤넬의 모자가 잘 팔리자, 샤넬은 복장 사업을 시작했고 그녀가 만들어낸 바지는 편하다며 여성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몇몇 여성들은 샤넬의 복장에 반감을 가졌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21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 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1924년 이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이에 샤넬은 불행한 사자자리의 숙명을 가진 여자라 불리기도 했다.

1934년에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샤넬은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사업을 접기로 해 일시 은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면서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하였다.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샤넬은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전후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1954년에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왔지만 <매국노>라는 경멸과 나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으로 샤넬의 발목을 잡아 위상이 약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고, 미국에선 <과거 50여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디자이너>라 하여 오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71년, 거주하던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중 88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로 프랑스의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망명 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업적: 사랑과 일, 영욕(榮辱)과 부침(浮沈)의 사연

20세기의 여성 패션의 혁신을 선도한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육원에서 보내며 바느질 등 의복에 관한 기술을 익혔다. 18세 이후 가수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1910년 파리에 여성 모자를 파는 작은 의상실을 열면서 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1913년 휴양도시인 도빌에 의상실을 연 샤넬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운동복용 옷감 '저지(jersey)'를 이용한 여성 의상을 처음으로 디자인하여 활동성과 우아함을 동시에 지닌 의상들로 점차 유명세를 탔다.

그의 디자인 모토는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이다. 코르셋 등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 오늘날 샤넬 슈트라고 불리는 카디건 스타일의 슈트를 발표하여 패션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검정색 가죽 퀼팅 가방은 샤넬을 대표하는 아이템으로 꼽힌다. 2차 대전 중 활동을 중단하였지만, 1954년 패션계로 복귀해 '샤넬 스타일' 디자인에 힘을 쏟았다. '내가 곧 스타일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명언: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하라

“사람들은 나의 옷 입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지만 그것이 바로 내 성공의 비결이었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늘 달라야 한다.”

“남자들이란 모름지기 어린아이와 같다는 걸 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안 것이다.”

“패션은 복장에만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패션은 하늘에도 거리에도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자 늘 새롭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진정으로 럭셔리 한 스타일이라면 편해야 한다. 편하지 않다면 럭셔리 한 것이 아니다.”

“일할 시간과 사랑할 시간. 그밖에 또 다른 어떤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돈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부유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다르다.”

“우아한 기품은 새 옷을 입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패션은 건축이다. 그것은 균형과 비율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럭셔리한 것을 사랑한다. 럭셔리한 것은 부유함이나 화려한 꾸밈에 있지 않다. 그것은 비속(卑俗)한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비속함은 인간의 언어에서 가장 흉한 말이다. 나는 그것과 늘 싸우고 있다.”

에피소드: 샤넬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이다.

#1. 샤넬이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를 만들기로 할 때 열한 살 연하의 러시아 귀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과 열애 중이었다. 이 두 사람은 곧 개발에 합의하여 80개가 넘는 향료의 화학성분을 섞어 연구를 계속하여“샤넬 No5’를 개발했다.

#2. 1971년 1월 10일 일요일, 산책을 하고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한 피로를 느끼며 외쳤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창문을 열어줘!” 놀란 가정부가 샤넬의 방으로 뛰어갔다.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3. 나치 첩보원 활동을 하였고 첩보 암호명이 ‘모델의 모자’, '모자 견본'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