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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카이사르 “이제 지중해에서는 아무도 로마를 이길 수 없다!”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카이사르 “이제 지중해에서는 아무도 로마를 이길 수 없다!”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3.11.30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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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로마 공화국의 정치가, 장군으로서 로마 공화국이 로마제국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민중의 노선에 섰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여 로마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고, 민중의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의 사랑하는 부하에 의해 사망하는 비운.

INTRO: 주사위는 던져졌다, ‘브루투스 너마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동맹을 맺고 콘술이 되어 민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지방장관으로서 갈리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인 지배자가 되어 각종 사회정책, 역서의 개정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생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 BC 44)는 로마 출생. 영어로는 시저라고 읽는다.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

BC 69년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 BC 63년 법무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민심 파악의 수완이 능하여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 서서 로마와 기타 속주(屬州)에서 군무에, 그리고 실제의 정책 운영면에서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어 명성을 획득하고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동맹(三頭同盟)을 맺고,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執政官)에 취임하였다. 그의 성인 Caesar는 라틴어의 동사로 자르다(Tagliare)에서 유래 되었거나, 푸른 눈(celeste)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쓴 <갈리아 전기(戰記)>, <내란기>는 간결한 문체와 정확한 현실파악 등으로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진다. 사랑하는 부하에 의해 사망하는 불운을 겪는다.

업적: 개혁 및 사회정책의 상징

공화정권의 파괴자, 또는 반대로 제정의 초석을 굳힌 인물 등, 정치가로서의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구구하다. 풍부한 인간성, 그의 최후의 비극성 등 그 인간상에 대하여도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의 손으로 다루어졌다.

카이사르의 정치는 귀족 중심의 공화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대제국 로마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 역서의 개정(율리우스력)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카이사르가 취한 방향, 즉 도시국가에서 세계 제국으로 군림하게 된 로마를 지배 ·통치하는 데는 강력한 한 사람의 힘에 의하여서만 가능했다. 항상 운명의 여신과 함께 있다고 확신한 카이사르는 ‘운명의 총아’로 구가되었다.

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땅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다.

BC 52년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나자, 진압하였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 49년 1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하였다.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했고, 카이사르는 그곳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이어서 BC 47년 9월에는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다.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완전히 타도하고 내란의 막을 내렸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명언: 모든 것을 허용하면서 통제할 수 있는 위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주사위는 던져졌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기에 급급하다”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인사(人事)를 다하고 운명의 여신의 도움을 바라야 한다.”
“카이사르의 개인 사전에는 복수라는 낱말이 없다. 복수심에 불타는 쪽과 복수의 대상이 되는 쪽이 같은 수준에 있지 않으면 복수심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_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중에서

에피소드: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를 갖추다

#1. 돈을 빌리는 천재라고 일컬어진 그는 또한 인간적 매력도 풍부하여 뛰어난 웅변술과 함께 인심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다. 실전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군략을 짜내는 장군으로도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인심의 향방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민중파 정치가로서 사회개혁의 실효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제1급의 문인으로도 알려졌다.

#2. 쓰러지기 직전 카이사르는 암살 귀족들 사이에서 총애하였던 브루투스를 보았다. 죽기 직전 그는‘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신음을 뱉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공개된 유언장에서 브루투스가 2번째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고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민중의 분노는 거셌다. 카이사르는 화장되었고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가 카이사르의 무덤은 없다.

#3. 카이사르의 독서량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타가 공인했다.

#4. 카이사르의 죽음 원인을 너그러움과 성급함의 결점으로 본다. 카이사르는 '이민족'에 대해서는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결코 망설이지 않았지만, 그에게 반대하다가 패배한 로마인들에게는 거의 언제나 너그럽게 대했다. 그는 지적 능력을 발휘해 전투의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지만, 내부의 행정력과 통솔력에는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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