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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아버지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아버지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4.01.12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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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학문 전반에 걸친 백과전서적 학자로서 과학 제 부문의 기초를 쌓고 논리학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플라톤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왕자 시절의 알렉산더 대왕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B.C. 335년에 자신의 학교를 아테네 동부의 리케이온에 세웠는데, 이것이 페리파토스 학파(peripatetics : 소요학파, 逍遙學派)의 기원이 된다. 그는 플라톤의 비물체(非物體)적인 이데아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INTRO: 플라톤의 제자, 체계적이고 방대한 정치철학의 시조

고전적 공화주의의 시원(始原). 시민적 덕성과 도덕적 탁월함. 체계적이고 방대한 주제에 대한 연구를 물려주었다. 플라톤의 정치 철학을 출발점으로 하여 정치학의 정점을 이루었다. 스승인 플라톤에 비해 현실주의자로서 실현 가능한 최선의 형태로서의 국가를 주장한다.

선이라는 이념을 실현시키는 관점으로 단순히 외적으로부터의 방위나 치안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공동체성의 회복을 요구한다.

생애: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의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BC 384년~BC 322년)는 그리스 북쪽 스타게이로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Nikomachos)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아민타스 3세(Amyntas III)의 친구이자 주치의였고, 그의 어머니 파에스티스(Phaestis)는 부유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당시 지중해 연안의 귀족 자제들처럼 17세의 나이에 아테네로 유학을 왔다.

다만 거의 20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토론과 강의로 세월을 보냈다. 아마도 학문적 열정이 없었다면, 이방인으로 아테네에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렀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방인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아테네인들은 자기들과는 다른 옷차림과 요란한 치장에 눈살을 찌푸렸고, 마케도니아와 아테네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그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도 순식간에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 북동쪽에 있는 오린토스(Olinthos)가 마케도니아의 수중에 떨어지자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정서가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335년 아테네로 돌아와 뤼케이온(Lykeion)에 학교를 세웠다. 기원전 322년 그가 아테네를 영원히 떠난 이유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불어 닥친 아테네인들의 마케도니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다. 그가 세운 학교는 아테네에 남았지만, 그는 아테네인들에게는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혹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영원히 떠나게 된 계기는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이 그에 대해 가졌던 반감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델피 신전에 헌정되었던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수모에 그가 크게 상심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 시점을 전후해서 그도 더 이상 아테네에 애착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정치철학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diagogai)이다. 반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으면서도, 변덕스러운 아테네가 제공한 자유로운 지식의 향연이 더불어 살기에는 오히려 더 좋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사상: 만학의 시조

다방면에 걸친 자연 연구로 ‘만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이슬람철학과 중세 스콜라학, 근대철학과 논리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는 존재와 그 구성ㆍ원인ㆍ기원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학, 인간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실천학,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이 포함되며, 창조성을 대상으로 하는 시(詩) 등 예술 활동이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아끼던 제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플라톤의 것과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정치철학을 플라톤의 것과 구별해서 ‘실천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추구하던 ‘철학적 지혜’(sophia)와 다른 개별적이고 특수한  ‘실천적 지혜’(phronēsis)로 정치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좋은 삶을 다루는 ‘윤리학’을 ‘정치’(politikē)에 포함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근본적 차이는‘정치’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론적 태도이다. 플라톤에게 ‘올바름’(dikaiosunē) 또는 ‘정의’에 대한 논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철학적 관조의 필요성으로 귀결되고, ‘철학’과 ‘정치’의 긴장은 ‘철인 왕’이 통치하는 ‘이상적인 정체’에서만 해소될 수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정의’란 인간적 관계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좋음의 이데아’를 보았고 공동체의 구체적인 요구를 초월한 입법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사람을 납득시켜 움직이게 하기 위한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수사는 설득의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첫째는 에토스로 윤리, 신뢰가 가는 인품. 즉 인성, 태도, 윤리성, 이미지 등과 관련된 것이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해도 그 말을 하는 화자가 도덕성을 의심받으면 사람들의 힘을 이끌어낼 수 없다.

둘째는 파토스(패션, 열정)로써 화자의 공감능력과 호감도로 청중의 심리 상태를 헤아리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 배려 등을 말한다. 셋째는 로고스로 논리력을 말하는데 설득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성으로 논리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명언: 정치적 감정과 개연성의 정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담긴 깊은 뜻은 이해할수록 더 위대하다.
나는 사랑에 대해 모르면서 안다고 말했었다. 세상과 자연에 대해 이해할수록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말을 담는 언어가 '사랑'임을 느낀다.”
“상대는 나의 거울이다.”

에피소드: 모든 인간에게 가장 좋은 삶을 다루는 윤리학

#1.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모은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도 돈 이야기는 자주 등장한다.

"관대한 사람은 올바르게 소비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괴로워한다. 또 취(取)해서는 안 될 곳에서 취하지 않는다. 어디서 어떻게 얻는지를 문제 삼지 않고, 어디에서든 무턱대고 돈을 취하는 사람은 방탕하거나 인색한 사람이다. 그들은 가난해야 할 사람에게 부를 주고,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을 소유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 이상국가를 꿈꾸었던 그에게 돈은 아무에게나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사람, 즉 돈을 제대로 쓸 사람에게 돈이 분배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유지된다고 믿었다.

#2. 탈레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재미있는 일화, 탈레스가 어느 날 별을 관찰하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걷다가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 장면을 본 하녀는 "자기 발밑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면서,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다니!"라며 그를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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