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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앙리 베르그송, 시간과 자유의지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앙리 베르그송, 시간과 자유의지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4.01.26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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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 블로그
출처=네이버 블로그

[김진혁 작가]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스 유심론(唯心論)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C.R.다윈·H.스펜서 등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였다.

INTRO: 지속의 철학

그의 철학 요체인 지속 이론을 정초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기억의 지속을 통해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규명한 ‘물질과 기억’, 생명의 약동에 의한 창조적 생성의 우주를 그려 보인 ‘창조적 진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준엄한 통찰과 열린 사회로의 도약 가능성을 역설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등을 주장했다. 그의 학설은 철학·문학·예술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생애: 유대인으로서의 정통성을 지닌 세계적 인기

베르그송(1859~1941)은 파리 출생. 폴란드계 유대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유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 3녀 중 둘째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조용하고 예의 바른 성격이었다. 동료 학생들은 계집애 같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이 성격은 평생을 가서 죽기 전까지도 계속 예의 바르고 차분한 삶을 살았다. 성적이 양호하여 항상 학력경시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입상했다.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치른 학력경시 대회의 <교차하는 양 평면에 접하는 구의 면적을 구하라>는 질문에 너무나 완벽하게 대답하여 수학 전문지에 게재될 정도였다.

그의 수학 스승인 데보브는 자신의 저서에 그의 <파스칼의 세개의 원> 문제에 대한 해법을 소개할 만큼 수학에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고등학교에 수학이 아니라 철학과를 선택했다. 수학은 집에서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강단 철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는 아주 인기있는 대중적 철학자로서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나중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다. 역사상 첫 유대인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베르그송은 당대에는 드물게도 국제적인 학술 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베르그송의 강의록을 모아놓은 <잡문집>에는 영국,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행한 그의 강연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베르그송의 영향력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끊임없이 증가하였다. 특히 1907년 출간된 <창조적 진화>는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는데, 그의 영향력에 우려를 느낀 바티칸 교황청은 1914년 <웃음>을 제외한 그의 모든 저서를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현실정치에도 뛰어들어서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촉구하는 프랑스의 사절단으로 우드로 윌슨을 만나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윌슨은 베르그송의 팬이었으며, 윌슨의 보좌관은 베르그송에게 "당신이 각하의 선택에 미친 영향력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후 윌슨이 꿈꾸던 국제연맹의 학술분과 기구에서 의장직을 맡으며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업적: 인간의 지성은 정적이며 생명의 비약

그의 학설을 요약하면 생물의 진화는 동물과 식물의 2대 방향으로 진화되었다. 지성적 인간은 전자의 정점(頂點)에 서 있다. 이 진화는 기계론적(機械論的)도 아니고 목적론적(目的論的)도 아니다.

이 진화는 동적(動的)이며 예견(豫見) 불가능한 내적(內的) 충동력으로 생명의 비약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창조적 진화이다. 인간의 지성(知性)은, 정적(靜的)이며 고정화(固定化)된 것을 다루는 능력이다.

지성은, 어떤 사물(事物)이 출현하면, 여러 기존요소를 재구성하여 이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관(直觀)에 의존해야 한다. 지성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며, 직관은 그와 같은 목적과 이해(利害)를 갖지 않으며, 다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지성이 대상의 외면(外面)만을 보고 방황하면서 관점에 따라 다른 상대성을 면하지 못하는 지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과는 달리, 직관은 대상의 내면(內面)에 깊이 파고들어 절대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준다.

지성의 산물인 자연과학은 지성의 모든 한계를 지니고 있다. 직관에 기초를 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지속·생성(生成)·진화를 파악하여 그것으로써 과학을 보완해야 한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규약을 엄수하며, 자발성과 자유는 최소한도로 억제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폐쇄된 사회에서 벗어나, 개방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랑이며 또한 사랑의 대상이기도 한 하느님을 신비적 직관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시간과 자유의지: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이론>(1889), <물질과 기억>(1896), <창조적 진화>(1907),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 <사상과 움직이는 것>(1934) 등이 있다. 191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며, 192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명언: 행동하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라

“현재는 과거밖에 담고 있지 않으며, 결과에서 발견되는 것은 원인 속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행동하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라. 강가에서 물고기를 보고 탐내는 것보다 돌아가서 그물을 짜는 것이 옳다.”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한 것이고, 성숙한 것은 끝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에피소드: 현대 프랑스 철학의 아버지

#1. 1922년에 파리에서 있었던 프랑스 철학회에서 베르그송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청중으로 참가했다. 이 강의에서 상대성 이론의 시간 개념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논쟁이 있었다. 서로 결론 없이 헤어진 후 아인슈타인이 남긴 말은 "과학자의 시간과 철학자의 시간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이었다.

#2. 베르그송은 자신의 행위가 격동의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항상 신경을 썼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으나 고통받고 있는 유대인들의 편에 서기 위해 끝까지 유대교인으로 남기로 결심했다.

말년에는 류머티즘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떨어진 파리에서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비시 프랑스 정부의 예외로 해주겠단 말도 무시하고 유대인으로 자신의 신분을 등록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유언은 "여러분, 다섯 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

#3. 1913년에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초대로 미국에서 반년 간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 때 베르그송의 강연을 들으러 몰려든 사람들이 뉴욕 브로드웨이에 역사상 첫 교통체증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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