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7:30 (토)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4.02.23 1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김진혁 작가]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철학자. 공산주의를 정립한 인물이다. 2008년 BBC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친 철학자를 뽑는 설문에 1위다. 그는 왜 가난한 사람은 항상 가난할까? 자본주의는 정말 이상적인 체제일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INTRO: 자본주의의 '과학적' 종말과 노동자 계급의 해방

19세기 산업혁명이후 노동자의 힘든 생활을 목격했다. 노동자는 실업의 공포에 떨었고, 이윤을 추구하는 경영자는 노동자의 임금을 최대한 낮게 억제하려 했고, 노동력을 줄일 수 있는 기계의 도입에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서 노동자가 주역이 되는 세상을 꿈꿨다.

생애: 세계 질서를 격변시킨 자본론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 출생. 아버지인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당시 유대인 차별 경향 때문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에 루터교회로 개종한 이력이 있는 변호사였으며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자유주의적 사고를 많이 물려받았다.

1830년 트리에에 위치한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며 라틴어, 희랍어, 작문, 수학 등에서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또한 자유주의 성향의 스승들을 만나며 봉건주의와 전제정에 대한 반감을 키워갔다.

아울러 사회개혁의 의지도 있어서 1835년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을 써서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법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 공부에도 계속 열을 올렸다. 특히 베를린 대학교는 헤겔이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던 곳이라 헤겔주의가 성행했다.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들과 주로 어울리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38년 20살이 된 해 학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르크스는 법학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이제 그는 철학에 완전히 몰두했으며 1839년부터 철학사 연구를 시작해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당시 산업혁명 직후로 수입이라고는 가끔 신문에 쓰는 기사 원고료가 고작이었고 옷을 전당포에 잡혀 외출 못하는 일이 흔했다. 더 괴로운 것은 종이가 없어 저술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병든 아이들 세 명은 약값이 없어 차례로 죽어갔는데 막내딸 프란체스카가 죽었을 때에는 2파운드가 없어 관도 못 사고 울어야만 했다.

그토록 처절한 빈곤 속에서 그가 얼마나 가진 자와 사회의 불평등을 저주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공산주의 혁명의 이론적 기반이 된 총 3권 17편, 97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그의 저서 ‘자본론’에 녹여있다.

그러나 그가 예언한 노동자의 천국,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는 끝내 구현되지 못했고 70년에 걸친 공산주의의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노동자의 임금과 생활환경은 더욱 열악해져 이 모순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멸망하고 세계는 새로운 체계로 발전한다고 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의 경우 노동자들의 임금은 꾸준히 증가해왔다.영국의 철학자 카알 포퍼(K.Popper)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은 자는 바보요 나이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고 말했다. 지상낙원을 만들겠다는 그의 저서가 거꾸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명분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3월 14일 오후 2시 45분,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겨우 2분 동안 혼자 남겨져 있던 사이,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 평화롭게, 영원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사상: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자본주의 사상의 골격은 개인의 소유 즉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개인주의를 기본으로 하지만 사회주의란 개인보다 사회전체의 이익부터 먼저 생각하자는 제도다.

사회주의 사상과 철학을 종합 정리한 카를 마르크스는 이론을 실천에 옮겨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한 레닌의 사상을 합친 공산당이 독재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곧 공산주의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마르크스 이론의 독특성은 그의 정신적 원류라 할 수 있는 헤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이지만,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주의', '사적 유물론' 등은 사후 엥겔스가 붙인 용어이다. 자본론 1장에서 잉여가치가 자본가의 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적인 사회의 부는‘거대한 상품 집적’으로 나타나며 각각의 상품은 이 부의 기본 형태로서 나타난다.”

명언: 종교는 인민의 아편

“모든 혁명은 낡은 사회를 해체시킨다. 그런 한에서 혁명은 사회적이다. 모든 혁명은 낡은 권력을 전복시킨다. 그런 한에서 혁명은 정치적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꺼져! 유언이란 살아서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한 얼간이들이나 남기는 거야...“
"인간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즐거이 원하는 대로 그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인간은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직접 마주치고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수된 그러한 조건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에피소드: 낭비벽과 경제 관념이 부족했다.

#1. 마르크스는 매우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가족끼리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거나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많이 얻었다.

이는 기자 생활을 했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월급이 들어오기는 했고, 당대 기준으로 수입이 썩 나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고정적인 것은 아니라서 들쭉날쭉했는데 부족분을 엥겔스의 재정지원으로 메운 것이다. 

#2. 아내가 사망할 당시 둘 다 병은 걸렸으나 돈이 없어서 골골거렸을 때 자기 아픈 건 끝까지 숨기면서 아내의 임종을 지켰다. 평생 혁명 생각만 하면서 아내를 고생시킨 마르크스가 유일하게 아내에게 잘한 일로 꼽힌다. 

#3. 마르크스는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낭비벽이 심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파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행했던 사치와 향락의 파티로 탕진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예술작품을 팔려 할 때 그의 어머니가 반대하자 엥겔스를 찾아가 "어머니가 죽는 게 더 나은 때가 온 것 같다" 며 망언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 유산을 다 팔고 돈이 없자 역시 귀족 딸이었던 부인이 물려받은 유산(주로 예술품)까지도 다 팔아버렸다. 경제 관념은 없기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까지 가난하게 살면서 마르크스를 미워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