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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발명왕 에디슨
[김진혁의 얇지만 넓은 리더 이야기] 발명왕 에디슨
  • 김진혁 작가
  • 승인 2024.03.22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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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작가] 미국의 발명가. 특허 수가 1000종을 넘을 정도로 많은 발명을 하였고 특히 중요한 것은 백열전구를 개선·발전시키고 그것의 생산법을 발명한 것이다.

전구실험 중에 발견한 ‘에디슨 효과’는 20세기 들어와 열전자 현상으로서 연구되고, 진공관에 응용되어 전자공업 발달의 바탕이 되었다.

INTRO: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미국의 발명가 및 사업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사람으로 1093개의 미국 특허가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참고로, 비공식적으로는 2332개를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토머스 에디슨은 후에 제너럴 일렉트릭을 건립하였다.

생애: 호기심의 왕자, 달걀을 가슴에 품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은 오하이오주(州) 밀란에서 태어났다. 특허 수가 1000종을 넘어 ‘발명왕’이라 불리고 있다.

제재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새뮤엘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854년 미시간주 포트휴런으로 이사를 가 그곳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산만한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3개월 뒤부터 그의 어머니가 집에서 그를 가르쳤다.

집안이 가난하였기 때문에 12세 때 철도에서 신문·과자 등을 팔면서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화물차 안으로 실험실을 옮겨 실험에 열중하였다.

신문을 팔던 어느 해 기차 실험실 안에서 화재를 일으켜 차장에게 얻어맞은 것이 귀에 청각장애를 일으키게 되었고, 그 후로 사람들과의 교제도 끊고 연구에만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15세 때 역장집 아이의 생명을 구해준 답례로 전신술(電信術)을 배우게 되어 1869년까지 미국·캐나다의 여러 곳에서 전신수로서 일하였다. 1868년에 전기 투표기록기(投票記錄機)를 발명하여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이어서 다음 해에는 주식상장표시기(株式上場表示機) 인자전신기(印字電信機), 1877년 축음기, 1879년 백열전구, 1891년 영화 촬영기·영사기, 1891~1900년 자기선광법(磁氣選鑛法), 1900~1910년 에디슨 축전기 등을 계속 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한때 사업을 중단하고 해군 고문회의의 회장직을 맡아 군사과학상의 문제에 몰두하다가, 종전 후 다시 웨스트오렌지에 있는 연구소와 공장으로 돌아와 고무 대용식물의 탐구 등에 주력,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하였다.

발명왕 에디슨./출처=픽사베이
발명왕 에디슨./출처=픽사베이

업적: 세계 최초의 이동 화학실험실을 만들다

에디슨은 학자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실험과 호기심을 통한 발명으로 미국을 응용기술 면에서 유럽을 압도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

백열전구를 개선·발전시키고 그것의 생산법을 발명했다. 탄소 필라멘트의 채용으로 40시간 이상이나 계속해서 빛을 내는 전구를 만들었다.

전구를 보급하기 위하여 소켓·스위치·안전퓨즈·적산전력계(積算電力計)·배전방식 등을 고안하고, 효율이 높은 발전기와 배전반(配電盤)의 설계 등을 만들었다.

1882년에는 세계 최초의 중앙발전소와 에디슨 전기회사를 창립했다. 월가의 재벌들이 그의 특허를 손에 넣고자 서로들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그의 회사는 전구의 특허권을 둘러싼 소송으로 많은 경제적인 손실을 보고 그 결과 그는 회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전구를 발명하였으나 전혀 이익을 보지 못했다”

그는 대학의 강의를 경멸하였다. 보통 교육에 대해서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맞추어 가고 있다. 독창적인 사고를 길러내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라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천재란 99%가 땀이며, 나머지 1%가 영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년의 술회(述懷)에서 “나는 발명을 계속하기 위한 돈을 얻기 위하여 언제나 발명을 한다”는 말과 더불어 끊임없이 연구와 창조를 계속하는 발명가 정신을 유지했다.

명언: 나를 귀멀게 한 이에게 감사, 실험할 때도 귀를 막을 필요가 없다.

1) 나는 평생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재미있는 놀이였다.
2) 내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은 모든 것에서 밝은 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3)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은 끈기가 약하다는 것이다.
4) 남에게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비판은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이다.
5) 인생의 실패자들은 포기할 때, 자신의 성공에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모른다.
6) 천재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재능 있는 사람일 뿐이다.
7) 인생에 규칙이란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8)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
9) 운동을 하면 근육이 커지는 것처럼 머리를 많이 쓰면 두뇌의 힘도 강해진다.
10) 성공은 정신과 육체를 하나의 대상에 엄격하게 집중시킨 결과다.

에피소드: 천재란 99%가 땀이며, 나머지 1%가 영감이다

#1. 젊은 시절 에디슨은 하루 평균 20시간씩 일하면서도 그것을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공부라고 여겼다.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면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성공의 열매를 따낼 수 있다.

#2. 어린 시절 무척 가난하여 늘 기차간에서 사탕과 신문을 팔곤 했다. 어느날 기차 관리인이 에디슨의 뺨을 후려쳐 그만 청력을 일게 되었다. 위인이 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제나 그에게 감사한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날 조용하게 살 수 있게 했으니, 실험실에서도 귀 막을 필요가 없다”

#3. 에디슨은 가족에게는 소홀했다. 평소 쓸 만한 발명품을 만들지 못한다고 구박했던 첫 번째 부인이 죽었을 때 에디슨은 일이 바쁘다며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자식들을 대학에도 보내지 않아 자식들의 삶도 좋지 못했다. 첫째 아들 토머스 주니어는 '전기 활력 회복기’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 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이었고, 둘째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주는 처지가 되었다.

다만 셋째 아들 찰스 에디슨은 정계로 진출해 훗날 뉴저지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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