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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화 독립운동가 박병선 박사, 국립묘지 안장 추진
21세기 문화 독립운동가 박병선 박사, 국립묘지 안장 추진
  • 이명훈 기자
  • 승인 2011.11.23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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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브리핑 이명훈 기자] 프랑스에서 우리 문화 수호에 평생을 바친 민제(民薺) 박병선 박사(1923년 9월생)가 11월 23일 오전 6시 40분(현지시간 11월 22일 오후 10시 40분) 파리 잔 가르니에 병원에서 타계했다. 故 박병선 박사는 먼지더미 속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내고,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하였으며, 프랑스 내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등 해외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적 진실을 밝혀낸 선구적 사학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최광식)는 고인이 국가 사회에 현저한 공헌을 한 업적을 기리고 유족의 뜻을 들어 故 박병선 박사의 국립묘지 안장을 추진키로 하고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안장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할 계획이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故 박병선 박사의 빈소가 프랑스 파리 현지 한국문화원에 마련될 예정이다. 고인의 유해는 현지에서의 장례 절차를 마친 후, 국립묘지 안장이 확정되는 대로 한국으로 오게 된다.

고인의 업적으로는 우리나라 여성유학비자 1호로 프랑스로 유학하여 역사학 박사(프랑스 파리제7대) 취득 및  1967~1980년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동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최초로 발견하여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또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직지심체요절'이 우리 문화재임을 발견하고,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도  직접 실험을 통해 밝혀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선진적 인쇄기술과 문화적 전통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인은 30여년의 긴 세월동안 자비로 혼자서 외규장각 의궤목록과 요약본을 불어로 정리하고, '병인년, 조선을 침노하다'라는 한국어/프랑스어 서적을 발간, 병인양요 등 의궤 반출 배경과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를 전 세계적으로 이슈화함으로써 외규장각 도서반환 운동을 촉발시키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로 반환하게 이끈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한국코너 한 귀퉁이에 있었던 직지를 처음 접했으나, 직지를 단순히 찾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계최고본으로 인정받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자라는 사실을 직접 증명해냄으로서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케 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진실을 세상에 처음 드러냈다.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한국이 78년이나 앞서 사용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당시 한국인쇄술에 대한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중국, 일본의 인쇄술관련 책자를 섭렵하고 프랑스내 대장간을 돌며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감자와 지우개 등 각종 재료를 사용, 금속활자와 목판인쇄술의 차이점을 직접 증명하며 3번의 화재까지 겪는 험란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증명했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유네스코가 정한 1972년 '세계도서의 해'에 프랑스국립도서관 주최 'BOOKS'전시회와 유럽내 '동양학 학자대회'에서 발표되어 인정을 받았다.

박사의 직지에 대한 연구는 그 후 한국 서지학 학자들에 의해 계승,  많은 연구 성과를 낳았고, 궁극적으로 2001년 9월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직지는 유네스코에서 해당국가에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책이기 때문에 소재가 어딘가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유일한 사례로서, 박사의 연구성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금속활자의 발명은 1999년 미국 유명시사지 '라이프'에서 조사한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준 100대 사건 중 1위를 기록할 만큼 인류역사상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엄청난 발견으로서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또한, 박사는 '한국의 인쇄'를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등 4개국어로 발간(2002~2006), 전세계에 배포함으로서 한국의 인쇄기술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고인이 병인양요를 통해 프랑스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찾기 위하여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30여년의 긴 세월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가면서 의궤를 세상밖으로 꺼내는 추적과정은 가히 21세기의 문화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다. 고인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13여년 근무하면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전혀 없이 매일같이 외규장각 도서목차를 베끼고 내용을 정리하는 등 혼자만의 외롭고도 고독한 연구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자그만 체구에 큰 의궤책속에 묻혀사는 '파란 책속에 묻혀 사는 여성'으로 불리기도 하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의궤에 바쳐왔다.

심지어 박사 개인의 골동품까지 팔아가며 연구비용을 조달했으며, 의궤연구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열정탓에 시간이 없어서 밥도 제대로 못먹고 물과 커피로 배를 채우는 시간들이었다는 지독한 자기헌신과 열정은 오늘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초석이 되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측의 박사 개인에 대한 지독한 냉대와 의궤도서에 대한 보호장치 강화 등은 외규장각 의궤의 중요성을 프랑스 정부에서 인정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도서관측은 한국에서의 언론보도를 매일매일 스크린하는 등 극도로 예민하게 대응하며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외부에 누설시켰다는 반역자 취급을 하며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고, 결국엔 한국에 외규장각을 알렸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아 사실상의 해고조치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서관당국의 강제적인 의궤도서 대출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박사의 출근투쟁으로 하루한권씩 과장허가를 받아 대출하되 무슨 내용을 본 것인지 보고토록 바뀌었고, 이후 몇해동안 계속되는 박사의 지칠줄 모르는 연구노력에 결국은 자유롭게 대출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박사는 결혼도 포기하고 한국에서의 교수직 제의도 거절하며, 프랑스국립도서관측의 박해와 설움을 받아가면서도 반평생 연구에만 몰두해 외규장각 위궤 귀환이라는 국가적 과업의 불씨를 당기고, 우리나라의 잃어버린 역사 한쪽을 145년만에 찾아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단순한 문화재의 반환이 아닌, 조선이라는 국가의 공식문서의 반환이라는 역사적 명분을 가짐으로써 앞으로 우리나라와 프랑스 등 선진국간의 미래를 위한 신국제관계를 형성하는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의궤는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당시 조선이라는 국가의 공식문서로서의 중요성과 우리 한국민의 민족의 얼이 담긴 아주 중요한 문화재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기록되어야 할 사항이다.

또 외규장각 의궤 반환은 한-프랑스간 외교관계의 강화, 미래발전을 위한 걸림돌 해소라는 국익차원에서 성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문화재의 반환이 아닌, 신국제 관계 형성의 단초로 볼 수도 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남동생 박병용(30년생, 미주 거주)과 조카(은정희, 파리에서 고인 간병 / 박문옥, 한국거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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