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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블 스토리-정명숙 작가] 내 아름다운 사랑 (9화)
[포블 스토리-정명숙 작가] 내 아름다운 사랑 (9화)
  • 이명훈 기자
  • 승인 2013.10.22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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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 그의 다른 여자

재원과 진희는 매일의 저녁시간을 함께 보냈다. 재원이 피곤한 몸으로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진희의 환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두 사람은 이따금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 단지 안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저녁 장을 보기도, 빵집에 들려 아침에 먹을 빵을 사기도 했다.

이따금 이지만 재원은 오랜 자취생활에서 배운 몇 가지 음식들을 진희에게 만들어주곤 했다. 진희는 재원이 싱크대 앞에서 앞치마를 하고 손수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와 감자를 얇게 썰어 넣은 감자수제비를 아주 맛있게 먹곤 했다. 소꿉장난 같지만 즐겁게 저녁을 준비하고 감사하게 소박한 식탁을 함께 마주했다. 설거지는 늘 재원이 자진했다. 진희는 ‘내가 좀 고루하고 촌스러운지 몰라도 설거지 하는 남자는 싫다며’ 떠밀어내도 재원은 늘 같은 모습으로 남은 음식들을 정리해서 냉장고에 넣고 설거지가 끝나면 마른 행주로 그릇들을 닦고 고무장갑도 헹구어 뒤집어 놓았다. 진희는 그런 그의 모습에 행복했고 한 없이 고마웠다. 자신이 원하던 꼭 그런 모습이었다.


설거지를 하는 재원의 등 뒤에서 진희가 두 팔로 그를 세게 안았다.

「행복해」

재원의 조용한 미소가 진희의 가슴에 아로 새겨졌다. 진희는 이제 재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일 년이란 시간은 두 사람이 촉감만으로도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진희도 잔잔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4년 동안, 아니, 군대까지 더하면 6년이 넘게 설거지를 해왔어. 내가 먹은 건 당연히 내가 하는 게 맞지. 누군가가 내가 먹은 그릇들을 씻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저건…… 내가 해야 될 일인데 하는 생각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고……」

진희는 재원의 등 뒤에서 허리에 두룬 자신의 팔에 힘을 주었다.

‘깊숙이 아주 깊숙이 형체도 없이 당신의 몸에 스며들고 싶어. 하나도 남김없이 나를 당신에게 새겨 넣고 싶어요.’


진희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재원의 따뜻한 가슴을 느끼며, 이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 했다. 이 사람을 위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하루 종일 그이만 생각한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학원에서 퇴근하자마자 지하철역까지 뛰어가는 날도 있었다. 그의 집에 오면 살고 있는 집에 돌아가기 싫을 만큼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와 함께 그의 침대에서 몸을 포개어 그의 얼굴을 만지며 잠들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그의 속눈썹과 입술을 손가락으로 어르면서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가슴에 안기어 잠들고 싶었다. 그렇게 아침을 맞았으면 좋겠다고 만날 만날, 생각했다. 그보다 먼저 일어나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가 진희,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것만으로 진희는 가슴이 아플 만큼 행복함을 느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재원만을 평생 동안, 아니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 그녀의 영혼은 재원의 것이었다.

진희는 하나도 남김없이 그에게 자신을 허락했다. 젓가락을 드는 긴 손가락, 그가 끓여주는 녹차, 소리 없이 치아가 훤히 보이도록 웃는 맑은 웃음으로 설거지를 끝낸 재원이 거실 소파로 진희를 번쩍 들어 안고 갔다.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은 음악을 들으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진희는 재원의 가슴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진희의 모습을 보며 재원은 혼자서 상념에 빠졌다.


제10화 - 나는 심장이 없어

‘나한테는 심장이 없어. 토끼의 간처럼 나는 심장을 꺼내놓고 살아. 누군가를 줘버렸는데 안돌려 주더라고. 그런데 웃기는 건 심장이 없어도 가슴이 아프고 답답할 때가 있어. 그래서 심장이 없는 나는 차가운 파란 피만이 흘러. 니가 듣고 싶어 하던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서 미안해. 따뜻한 말들은 목젖을 통과하지 못해. 하지만 나, 이제 해보려고. 조금 천천히 열어도 괜찮지.’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나, 알고 있었어요. 전부터. 문득 문득 먼 곳을 보고 있는 당신이 언제쯤 나에게 온전하게 올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났어요. 나, 이제 그러지 않을게요. 당신의 진심을 천천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당신을 믿어요.’

「안드레이 보첼리」의 목소리 사이로 진희의 마음이 겹쳐졌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입 속의 검은 입」중

‘창밖을 봐. 당신과 함께 있는 빈집에서. 어느덧 여름인가 했는데 가을이 그 속에 들어있네. 가을이 오기 전에 툭툭 털어버리고 단풍이 들기 전에 오길 바라.’ (계속)

[글 : 정명숙 작가 / 사진 : 이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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